항목 ID | GC08001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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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周留市-廢墟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
시대 | 시대 미상 |
집필자 | 김선아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66년 - 「주류시의 폐허」 『부안대관』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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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주류시의 폐허」 『전설지』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8년 - 「주류시의 폐허」 『전북 구비문화 자료집』에 수록 |
관련 지명 | 주류시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
성격 | 설화|폐시담 |
주요 등장 인물 | 분서왕|백발노인 |
모티프 유형 | 사라진 마을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서 주류시장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주류시의 폐허」는 신불을 노하게 하여 병마가 돌게 한 속인들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백발노인의 지시대로 시가지의 사람들이 모두 짐을 싸서 떠나갔기에 주류 시장과 희안 시장은 폐허가 되었다는 폐시담(廢市談)이다.
[채록/수집 상황]
1966년 부안군 번영회에서 간행한 『부안대관』에 「주류시의 폐허」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1990년 전라북도에서 펴낸 『전설지』의 533쪽에, 2008년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에서 간행한 『전북 구비문화 자료집』의 561~562쪽에도 각각 재수록되어 있다.
[내용]
백제의 10대 왕인 분서왕이 부안 개암동 우진암에 주류성을 쌓고 이궁[왕의 별궁]을 지어 가끔 행차했다. 분서왕 이후의 왕들도 이곳을 대대로 이궁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 지금의 감교리 일대가 매우 번성하여 시장이 생겼는데 이 시장을 ‘주류시’라고 했다. 주류시에서 유정치를 넘으면 보안현이 있는데 보안현 남포리 근처에도 시장이 있었고, 이 시장의 이름은 ‘희안시’이다. 변산 안에 많은 사찰이 있었고 800여 개의 암자가 있을 정도로 불교가 번성해서 주류시와 희안시는 더욱 번창했다. 그러다 고려 중엽 어느 해부터 이 두 시가지에 이름 모를 병이 돌면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병마가 돌게 된 원인을 명산의 신목을 베어서, 영산인 변산에 속인들이 많아져서 등으로 짐작하며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고, 불공을 드리기도 했지만 효험 없이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갔다.
어느 날 한 백발노인이 유정치의 고갯마루에 나타나 두 시가를 보며 영산인 변산을 속인들이 많이 더럽혀서 신불이 노한 것이니 속인들이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 소문을 듣고 두 시가지의 사람들은 모두 짐을 싸서 떠났으며 두 시장은 폐허지가 되었다. 감교리에는 토질[풍토병]이 오래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주류시의 폐허」의 주요 모티프는 ‘사라진 마을’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류시와 희안시가 사라지게 된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불토 영산인 변산 안에 속세의 때가 묻은 속인들이 많이 들어오자 신불은 병을 돌게 하여 변산 안을 깨끗이 정화하고자 했다. 원래 부안 변산은 백제의 왕이 이궁을 지을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지닌 곳이므로 속인들을 떠나게 하여 정화된 불토로서의 환경을 유지토록 하였다. 「주류시의 폐허」에는 변산을 아름다운 불토로 인식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전염병 때문에 두 시장이 사라졌을 확률이 높은데, 그런 상황을 불교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던 주민들의 불심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