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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구와 왕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167
한자 李書九-王浦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시대 시대 미상
집필자 김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5년 - 「이서구와 왕포」 『부안의 얼: 지명과 설화』에 수록
관련 지명 왕포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왕포마을지도보기
성격 설화|명당 파손담|지명 개칭담
주요 등장 인물 이서구|부안 장씨|검은 황소|학
모티프 유형 풍수지리|명당 파괴|지명 유래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왕포마을에서 이서구왕포 이름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이서구와 왕포」는 왕이 없이 군신봉만 있을 수 없으므로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파묘를 명했다는 명당 파손담이자, 거짓말을 한 소금 장사가 ‘왕포(王浦)’를 ‘왕포(旺浦)’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는 지명 개칭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5년 부안군교육청에서 펴낸 『부안의 얼: 지명과 설화』에 「이서구와 왕포」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

왕포마을운호리에서 마동리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조선 숙종 때 이곳에 김해 김씨가 정착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 말엽 전라 감사인 이서구변산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왔는데 금관자, 옥관자 차림의 부안 장씨들이 군신봉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서구는 풍수지리에 밝았다. 군신봉의 묘소가 명당임을 알고 지나가는 소금 장사에게 왕(王)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 근처에 있는지 물으니 그런 마을이 없다고 답했다. 이서구가 파묘하라고 명하자 갑자기 묘소에 검은 황소가 나타났다. 그 황소의 등에 학 세 마리가 앉아 있다가 고창, 운호, 마동 방면으로 각자 날아갔고 황소도 사라졌다.

군신봉의 파묘 자리가 백 년 후에 소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씨들이 파묘한 석관 자리에 숯을 묻었다. 훗날 확인해 보니 숯이 흩어진 자리는 있었지만 숯은 찾지 못했다. 파묘 후 장씨 집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한다. 운호의 누에머리산은 장씨 집안의 선산인데 묘소가 순서 없이 흩어져 있다. 이서구에게 왕(王)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 없다고 답한 이는 왕포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후회하면서 ‘왕포(王浦)’를 ‘왕포(旺浦)’로 개칭하여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모티프 분석]

「이서구와 왕포」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지리’, ‘명당 파괴’, ‘지명 유래’ 등이다. 이서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이덕무(李德懋)[1741~1793], 박제가(朴齊家)[1750~1805], 유득공(柳得恭)[1749~?]과 함께 사가 시인(四家詩人), 실학 사대가(實學四大家)로 칭해진다. 왕(王)자가 들어가는 마을이 있느냐는 이서구의 물음에 소금 장사가 잘못 대답하고, 이 대답은 파묘라는 결과를 불러온다. 파묘할 때 나타난 검은 황소와 고창, 운호, 마동 방향으로 각각 날아간 세 마리의 학은 부안 장씨의 터주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명당자리에 묘를 모신 덕택인지 터주신이 보호해 주어서 평안했던 부안 장씨 집안사람들은 파묘 후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소금 장사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왕(王)을 왕(旺)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이서구와 왕포」 이야기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한 말 때문에 한 집안이 어려움에 놓이게 되는 황당한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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