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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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蝟島-[願堂祭] |
영어공식명칭 | Wido Ttibaennori |
이칭/별칭 | 위도띠뱃굿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8년 -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위도띠뱃놀이’로 대통령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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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2월 1일 - 위도 띠뱃놀이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3호 지정 |
놀이 장소 | 위도 띠뱃놀이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 |
성격 | 마을 굿 |
노는 시기 | 정월 초사흩날 |
예능 보유자 | 김상원|이종순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3호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에서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굿.
[개설]
위도 띠뱃놀이 는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부르게 되었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원당은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 동편 당제봉 정상에 위치한 마을 제당이다. 제당 이름인 ‘원당(願堂)’은 서낭신에게 소원을 빌면 잘 들어준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맞배지붕의 2칸 기와집으로 된 당집에 서낭신이 모셔져 있다. 원당에 열두 서낭을 모셨다고 하나 실제 원당 안에는 10위의 서낭이 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대리 마을 사람들은 원당에 올라가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원당제’를 지낸다.
원당은 대리 주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어민들에게도 신령하고 영험한 당으로 여겨졌다. 1900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당중수기(願堂重修記)」에 인근 도서뿐만 아니라 멀리 황해도 옹진에서도 보수비용을 제공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다른 지역 어부들이 위도 앞바다를 지날 때면 원당을 향해 뱃고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원당제 후 마을 앞 바닷가에서 용왕제가 행해지는데, 마지막에 띠배를 먼 바다로 끌고 나가 띄워 보낸다. 띠배를 띄워 보내는 데에는 한 해의 액운을 실은 띠배를 멀리 떠나보냄으로써 어민들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띠배를 띄워 보낼 때 풍물을 울리고 술배소리, 에용소리, 가래질소리 등 뱃노래를 부르며 축제적 분위기가 펼쳐지므로 이를 ‘띠뱃놀이’라 하였다. 대리 마을의 정월 초사흗날 마을 제사는 당산제, 원당제, 띠배 만들기, 주산 돌기, 용왕제, 띠배 띄워 보내기, 뒤풀이 등으로 구성된다. ‘원당제’와 ‘띠뱃놀이’는 위도 대리 마을 제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절차이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 대리 마을굿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당제 때 선주들이 배서낭을 내림받고 용왕제 끝에 액을 실은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는 과정은 서해안 일대 다른 지방에서 행해지는 풍어제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원당굿과 용왕굿은 무녀가 주관하고, 이 외에 마을 제사 전 과정에 풍물패가 관여하고 있어 풍물패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풍물패는 일행이 제장으로 이동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하고, 굿에서는 악사 역할, 때로는 사제자 역할을 한다.
위도 원당제는 근본적으로 대리의 풍어와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이지만 근래에는 위도를 대표하는 굿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사의 주체가 1980년대에 조사된 축문에는 동네 일촌 거주민이었으나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축문에는 ‘위도 면내 농어민’으로 되어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위도띠뱃놀이보존회에서 주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위도 띠뱃놀이 공개 행사로 굿이 행해지기 때문에 이때 관람을 위해 위도를 찾는 외지인도 증가하고 있다. 사회 변화에 따라 원당제는 마을 신앙과 관광 축제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원]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조선 중기의 위도는 어민들이 많이 살며 청어가 많이 잡혀 봄에는 경향의 장삿배들이 모여들었고, 진(鎭)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요 어종이 청어에서 조기로 변한 후에도 위도는 조기잡이로 명성을 날리던 칠산 어장의 중심지였다. 위도 대리 원당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위도 앞바다 칠산 어장에서 조기잡이가 활발하던 시절 가장 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도 칠산 어장의 조기잡이는 1920년대 무렵까지 이루어지다가 점차 쇠퇴했지만 위도 대리 원당제는 대리 주민들의 마을 신앙으로 지속되고 있다.
대리의 원당은 대리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서해안 어민들에게도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원당중수기」[1900]에는 대리 원당을 보수하기 위해 비용을 추렴한 경위, 주도자와 기부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위도의 선주뿐 아니라 줄포, 법성포, 비응도, 군산, 계화도, 완도, 멀리는 황해도 옹진에서까지 선주, 어부, 상인이 원당의 중수 비용을 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해안 원근 지역에서 원당 중수 비용을 희사했다는 것은 원당이 서해안 어로 신앙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보여준다.
‘원당제’는 대리 마을 제사의 한 절차이면서 동시에 대리 마을 제사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띠뱃놀이’도 마찬가지이다. 대리 마을 주민이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위도 띠뱃놀이로 전라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1985년 2월 1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원당제’보다 ‘위도 띠뱃놀이’라는 명칭이 대외적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원당굿, 띠뱃굿, 풍어제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이러한 명칭들이 사용되기 전에 마을 주민들은 ‘제만[지만] 모신다’, ‘당 올라간다’, ‘띠배 띄운다’와 같이 의례 행위를 중심으로 표현했다.
과거에는 정월 초사흗날 굿이 끝나고 해가 완전히 진 후, 화주와 원화장이 마을의 서쪽 봉우리인 도제봉에 올라가 제사 터에서 깨끗하게 메를 지어 제물과 함께 진설하고 배례하며 엄숙하게 도제를 지냈다. 도제는 마을굿을 무사히 마친 것을 산신께 감사하는 의미의 의례로 행하였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는다.
[신당/신체의 형태]
원당은 대리 마을 왼쪽으로 경사가 가파른 당제봉 정상에 있다. 남향으로 자리잡은 당집은 맞배지붕에 3평 남짓의 2칸 기와집이다. ‘원당’이라는 이름은 당에 모셔진 서낭신이 소원을 잘 들어준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다. 원당에는 마을과 바다를 수호하는 열두 서낭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당집 안에 실제로 모셔진 신위는 여덟 서낭이다.
당집 안에는 원당 마누라[원당 부인], 본당 마누라[본당 부인], 옥저 부인, 손님네, 산신, 장군 서낭, 문수영 대신[좌우] 등 여덟 서낭의 당신도가 안치되어 있다. 여덟 서낭 가운데 원당 마누라, 본당 마누라, 장군 서낭이 특히 중요한 신격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와 2000년대를 비교해 보면, 1980년대에 있었던 애기씨 서낭이 없어졌고, 신령님은 손님네로 바뀌었다.
증언에 따르면 조기잡이가 활발하던 시절에는 인근 칠산 어장을 찾은 타 지역의 어부들도 대리 원당 부근 해역을 지날 때면 원당을 향해 뱃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원당이 대리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서해안 어민들도 신앙했던 신령하고 영험한 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절차]
1. 원당제 준비
1) 마을 회의
위도 띠뱃놀이 가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로는 위도띠뱃놀이보존회가 주관하여 마을 회관에서 원당제의 주요 제관인 ‘화주’와 ‘화장’을 선정하는 회의를 한다. 화주는 제물을 준비하고 의례를 총괄하는 제주이며, 화장은 화주를 도와 제물을 옮기고 진설하는 일을 맡는다.
문화재 지정 이전에는 이장이 마을 회의를 주재하여 정월 초사흗날의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으로 화주와 화장을 선정하고, 필요 경비와 거출 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과거에는 화주와 화장 외에 ‘제만’과 ‘부화장’도 생기복덕을 보아서 마을 회의에서 뽑았다. ‘제만’은 자신의 집을 제물을 장만하고 보관하는 장소로 제공하고 제물 준비를 도왔으며, ‘부화장’은 원화장을 도왔다. 또한 제를 지내는 데 필요한 경비를 집집마다 거출할 것인지, 선주들의 부담으로 할 것인지 등의 비용 마련 방법을 마을 회의에서 의논하였다.
2) 장보기와 제물 준비
정월 초이튿날 아침에 화주, 예능 보유자, 보존회 회장, 총무 등이 제물 구입 목록을 가지고 부안 격포로 나가서 장보기를 한다. 이때 화주는 부정 타지 않도록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고, 부정이 없는 상점에 가서 제물을 구입하며, 물건값은 흥정하지 않는다. 주요 제물은 돼지 한 마리, 쌀, 삼색실과 등이다. 일행은 장을 보고 돌아올 때도 엄숙하고 삼가는 마음과 자세를 취한다. 오늘날 제물 준비는 띠뱃놀이 전수관에서 한다.
격포항과 위도 간 항로가 개통된 1993년 이전에는 부안 줄포장을 보았다. 줄포장에서 구입해 온 제물은 제만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초이튿날 사이에 화주, 제만, 제만의 부인, 원화장, 부화장, 무녀 등이 제물을 준비하였다. 제물로 쓰는 통돼지를 ‘제숙’ 또는 ‘지숙’이라 하는데, 과거에는 위도에서 기른 수퇘지를 사용했다.
3) 제장 소제 및 준비
정월 초이튿날이 되면 마을 입구와 제물 준비 장소, 당산나무 등에 금줄을 쳐서 외부에서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마을을 신성한 영역으로 표시한다. 금줄은 ‘왼삿’[왼쪽 방향으로 꼰 새끼줄]을 쓰는데, 왼삿 금줄을 써야 귀신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정이 없는 마을 사람들 일부는 원당과 당을 소제한다. 오후에 화주와 화장, 그리고 부정이 없는 마을 남자들이 제만 집 역할을 하는 위도 띠뱃놀이 전수관에서 제숙으로 쓸 돼지를 삶고 떡쌀을 찧는다. 무녀와 화주는 돼지고기, 떡쌀, 술, 삼색과실 등을 굿 절차에 따라 나누어 준비해 둔다. 과거에는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이 화장실만 다녀와도 대롱샘에 가서 샘물로 몸을 씻을 정도로 제물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한다.
2. 원당제
1) 당에 오를 일행 집합
정월 초사흗날 아침에 화주, 무녀, 화장, 풍물패, 뱃기를 든 선주들, 마을 남자들 등 원당제를 지낼 일행이 위도 띠뱃놀이 전수관에 모인다. 전수관 앞마당에서 풍물패가 풍물을 울려 일행의 출발을 마을에 알리고 일행은 당제봉의 원당에 오른다.
2) 동편 당산제
원당제를 지내러 원당에 오르는 중간 길목에 있는 마을 동편 당산나무 앞에서 일행은 잠시 멈춰 풍물패가 당산굿을 치고 재배하는 간단한 의례를 행한다.
3) 제물 진설 및 독축
일행이 원당에 도착하면 무녀와 화주, 원화장은 제물을 진설한다. 화주가 술을 올리고 독축을 한다. 축문은 대리 마을뿐만 아니라 위도의 모든 마을이 한 해 동안 만사형통하고 무병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독축 후에는 화주와 상쇠가 재배하고, 무녀가 당굿을 준비한다.
4) 당굿
무녀는 징과 장구 반주로 아홉 거리의 굿을 한다. 옛날에는 ‘열두 거리 굿’을 했다고 전하나 실제로 행해지는 것은 아홉 거리이다. 무녀는 성주굿을 시작으로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세거리, 깃굿, 문지기굿 순으로 굿을 진행한다. 화주와 예능 보유자 또는 보존회 구성원이 악사를 맡는다. 무녀가 굿거리를 진행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당집 바깥에서 모닥불을 피워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시며 구경을 한다. 굿거리 사이사이에는 풍물패가 풍물을 치기도 한다. 원당굿의 각 굿거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성주굿: 성주신에게 마을 사람들의 명과 복, 풍어를 비는 굿.
②산신굿: 산신을 위하면서 마을의 평안과 복을 기원하는 굿.
③손님굿: 손님신[마마신, 천연두신]을 맞아 손님을 달래고 복을 기원하는 굿.
④지신굿: 터주신을 달래고 마을 사람들의 복을 축원하는 굿.
⑤서낭굿[원당·본당 서낭]: 여러 서낭신을 불러 위로하고, 이장이나 면장 등 마을 유지들과 주위의 인사들을 축복하는 굿.
⑥서낭굿[애기씨 서낭]: 애기씨 서낭에게 어린 아이들의 수명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굿.
⑦서낭굿[장군 서낭]: 장군 서낭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굿.
⑧깃굿: 선주들이 1년간 배에 모실 배서낭을 내림받는 굿.
⑨문지기굿: 원당을 지키는 문수영 대신을 위로하고, 여러 잡신을 풀어먹이고 원혼을 달래어 보내는 굿.
5) 깃굿
원당굿의 여덟 번째 굿거리인 깃굿은 무녀가 선주를 축원해 주고, 풍어를 기원해 주며, 선주들에게 1년 동안 배에 모실 배서낭을 내려 주는 굿이다. 먼저 무녀는 소지를 올리고 각 배의 선주나 화장을 한 사람씩 불러 놓고 서낭 이름 하나를 대면서 그 서낭을 내림받을 것인지 묻는다. 예컨대 “장군 서낭 가실랍니까?”라고 무녀가 묻고 선주가 대답하면 선주의 손바닥에 무녀가 산쌀[算米]을 집어주는데, 쌀알의 개수가 홀수이면 버리고 짝수가 나오면 선주는 쌀알을 입에 털어 넣고 그 서낭을 내림받은 것으로 여긴다. 무녀는 같은 방법으로 다른 선주나 화장들에게도 배서낭을 내려 준다.
무녀 옆에서 깃굿을 돕는 사람이 선주나 화장에게 서낭의 이름과 어선의 이름을 백지에 써 준다. 내림받은 배서낭의 이름과 어선의 이름을 적은 한지를 ‘깃손’이라 한다. 선주나 화장은 깃손을 받아 뱃기[오폭기]의 맨 꼭대기에 묶는다. 과거에는 뱃기 꼭대기에 깃손을 묶은 채로 들고 선주 집까지 달려 내려와 마당에 세워 두고 간단한 서낭맞이 의례를 행하기도 했다. 어민들은 내림받은 배서낭을 1년간 배 안에 모시는데, 배서낭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나 음식을 제물로 놓고 서낭을 잘 대접하며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였다.
3. 띠배와 제웅 만들기
원당제 일행이 원당에 올라 원당제를 지내는 동안 마을 남자들은 띠배와 제웅을 만든다. 띠배와 제웅을 만들 재료는 초이튿날 마을 남자들이 마을 뒷산에 가서 띠풀이나 억새 등을 베어 오고, 띠배 재료를 추렴하는 걸립굿을 해서 볏짚, 싸리나무, 새끼줄, 가마니, 널빤지, 스티로폼, 부망과 그물 등을 미리 모아둔다. 띠배 제작 순서는 널빤지와 나뭇가지로 배의 골격을 만든 다음, 배의 바닥 부분부터 위로 재료를 엮어서 배의 형태를 갖추어간다. 배의 윤곽이 잡히면 가마니로 돛을 달고, 배가 바다 위에 뜰 수 있게 스티로폼 부표도 여러 군데에 매달아 배의 꼴을 완성시킨다. 완성된 띠배의 규모는 길이 2~3m, 높이 70~80㎝, 폭 1.5~2m 정도이다.
띠배가 완성되면 성기가 부각된 사람 모양의 제웅[‘허수아비’, ‘허세비’ 등이라고도 함] 7개[또는 5개]를 만들어 배의 각 위치에 태운다. 제웅 5개는 동서남북 및 중앙 오방위의 재액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제웅 7개는 배에 타는 필수 선원 7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제웅은 마을의 모든 액을 떠맡아서 먼 바다로 떠나가는 액막이 역할을 한다.
4. 주산 돌기
무녀를 제외한 원당제 일행은 하산하는 길목에 있는 돌무더기 형태의 작은 당에서 풍물을 울려주고, 화주가 재배하고 헌식하는 절차로 간소한 의례를 행한다. 일행은 다시 마을 동편 바닷가 용왕바위로 가서 작은 당에서와 같이 풍물을 울려주고, 화주는 한지에 싼 용왕 밥을 바다에 던진 후 재배한다. 수중고혼을 달래고 바다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례이다. 무녀는 원당굿을 마친 후 곧바로 마을로 내려와 용왕굿을 준비한다.
원당에 올라갔던 일행은 마을을 둘러싼 주산자락을 한 바퀴 돌아 마을 앞으로 오는데, 이를 ‘주산 돌기’라 한다. 먼저 동편 당산으로 가서 풍물을 울리며 화주가 당 밥을 당산나무 아래에 묻고 재배한다. 그 다음은 마을 뒤로 펼쳐진 주산자락으로 이동하여 마을 정북쪽의 밭둑 한가운데 제터에 다다르면 화주가 당 밥을 묻고 재배한다. 그리고 서편 당산으로 이동하여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의례를 행한다. 다시 화주는 바닷가 절벽 아래에 있는 서편 용왕바위로 내려가 용왕 밥을 바다에 던지고 재배한다. 이렇게 일행이 주산을 돌아 마을 앞 바닷가에 이르면 곧 이어서 용왕제가 시작된다.
5. 용왕제
마을의 여러 성소와 주산을 돌아온 일행이 마을 앞 바닷가에 도착하면 풍물패가 풍물을 한바탕 쳐주고 나서 용왕굿이 시작된다. 띠배 옆에 차려 놓은 제상 앞에서 제관이 먼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소지를 올린다. 이어서 무녀가 장구 장단에 맞춰 용왕굿을 한다. 용왕굿은 사해용왕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고, 수중고혼이 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과거에는 용왕굿이 행해지는 동안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한 용왕상을 차려 해안가에 펼쳐 놓기도 했다. 용왕굿에는 원당에 올라가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도 모두 다 나와서 함께 어울린다. 용왕굿이 끝나면 용왕굿 제물을 제웅과 함께 띠배에 다 옮겨 싣는다.
6. 줄밥[가래밥] 뿌리기
용왕굿이 끝나면 바다에 나가 수중고혼이 된 이들에게 음식을 고루 풀어먹인다는 의미로 마을 부녀자들이 해안가를 따라 돌면서 바다에 줄밥을 뿌린다. 줄밥은 가래밥이라고도 하며, 밥에 뜸부기 등의 해초와 콩을 섞어 만든 것이다. 예능 보유자인 선창자가 「가래질 소리」, 「에용 소리」, 「술배 소리」 등의 앞소리를 메기면, 부녀자들이 함지박에서 바가지로 줄밥을 퍼서 바다에 뿌리면서 뒷소리를 받는다. 풍물패도 뒤따르며 흥겹게 풍물을 쳐준다. 줄밥을 다 뿌리고 나면 일행은 다시 띠배가 있는 마을 앞 바닷가로 돌아온다.
7. 띠배 띄워 보내기
바다에서는 모선(母船)이 기다리고 있다가 용왕굿이 끝나면 긴 줄로 띠배를 모선에 묶는다. 모선에는 풍물패와 소리꾼 등이 타서 띠배를 끌고 바다로 나간다. 모선에 탄 풍물패는 계속 풍물을 울려주고, 소리꾼들은 「배치기 소리」와 「술배 소리」를 하며 흥을 돋운다. 마을 사람들은 부둣가에서 띠배를 끌고 먼 바다로 나가는 모선을 환송하는데, 옛날에는 수십 척의 배가 바다에서 모선을 호위했다고 한다. 모선은 칠산 앞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띠배를 망망대해로 띄워 보낸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오는 모선을 맞이하고, 이후 남녀노소가 모여 뒤풀이를 한다.
[축문]
원당제와 용왕제에서 무녀가 굿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관이 독축을 하는데, 이는 위도 띠뱃놀이로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생긴 절차라고 한다. 원당제와 용왕제의 축문은 소원을 고하는 신위가 각각 열두 서낭과 사해용왕으로 다르지만 소원의 내용은 제액소멸, 재수대길, 만사형통, 풍농풍어, 무병장수로 거의 동일하다. 1980년대에는 대리 마을 이복동[1907~1989] 노인이 독축을 했고, 1990년대부터는 예능 보유자인 김상원이나 이종순이 주로 독축을 해오고 있다.
위도 원당제가 대리 한 마을의 제사에서 위도를 대표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하면서 소원을 고하는 주체도 변화한 점이 눈에 띈다. 1980년대 독축을 했던 이복동의 축문에서는 소원을 비는 주체가 “대리 거주자 농어민 일동 발원 감소고(大里居住者農漁民一同發願敢昭告)”, “원당하 대리 동내 일촌(願堂下大里洞內一村)”으로 대리 마을에 거주하는 농어민인데, 2007년 김상원이 독축한 축문에는 “위도 면내 일촌 농어민 일동 감소고(蝟島面內一村農漁民一同敢昭告)”, “원당하 위도 면내 일촌(願堂下蝟島面內一村)”으로 위도 면내 농어민으로 되어 있다.
[부대행사]
띠배 띠워 보내기까지 마치고 나면 주민들의 뒤풀이가 밤늦도록 이어진다. 옛날에는 초나흗날부터 보름날까지 마당밟이를 하였고, 대보름날이 되면 암수 두 줄을 꼬아서 남녀로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남녀노소가 「에용 소리」를 하며 흥을 돋웠고 줄놀이, 판굿, 탈놀이, 송장놀이 등을 하며 신명의 대동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현황]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된 위도 띠뱃놀이는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을 이어가고 있으나 사제무의 단절, 주민의 감소와 고령화, 어장의 황폐화 등 사회·경제·환경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어 지속적 전승이 위태로운 실정이다.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인 전승 방안을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금기를 철저히 지켰던 전통 마을 신앙의 문화적 가치와 외부 관광객에게 개방적인 관광 자원의 경제적 가치를 조화시켜 나가는 것도 그 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