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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870
한자 扶安東部敎會
영어공식명칭 Buan Eastern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부령로 391[하장리 74-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천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0년 4월 15일연표보기 - 오중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 오중교회와 오중제일교회로 분열
개칭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오중교회에서 부안동부교회로 개칭
최초 설립지 오중교회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덕신리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부안동부교회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부령로 391[하장리 74-4]
현 소재지 부안동부교회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부령로 391[하장리 74-4]지도보기
성격 교회
설립자 정문관
전화 063-582-2631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 교회.

[설립 목적]

부안동부교회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동쪽과 인접한 백산면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호남 지방이 복음화되었던 시대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30년 4월 15일에 정문관 및 15명의 교우가 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정문관은 해소병[천식]으로 고생하다가, 김제 옥산교회 최권능 목사의 집회에 참여해 신유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손자 정종원 목사는 “옥산교회가 김제 최초로 설립되었고, 지금의 김제 시내에 못 미친 외곽에 있었으며, 예배당은 거의 무너져가는 기와집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전라북도 김제에는 정문관의 외가가 있었고, 외할머니가 일찍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얼마나 신앙이 좋았던지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부안동부교회는 정문관이 외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권유로 참여한 옥산교회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해소병을 고치고,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덕신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가족을 비롯한 15명의 지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보면서 처음 세워졌다. 당시 예배 인도자는 김두남 장로와 이성렬 집사였다. 김두남 장로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고, 이성렬 집사는 구 오중교회 이일랑 장로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고, 6년만인 1936년에 정문관의 아들 정진철이 초대 장로가 되었다. 정문관[후에 영수가 됨]은 당시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덕신마을에서 상당한 부농이었다가, 대부분의 토지를 일제에 빼앗기는 바람에 가산이 급속히 기울었다.

아들 정진철 장로는 생계유지를 위해 전라북도 전주로 이사한 후 전주석탄에 취업해서 잠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이내 직장 생활을 접고 전북 YMCA 초대 총무로 활동하였다. 당시 전북 YMCA는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 중이었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을 초청해 시국 강연회도 열었다. 정진철의 동생들은 반공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정진철은 당시 대부분의 순회 전도자들처럼 곳곳을 다니며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며 전도했고, 급기야는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건너가게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약 한달 이상 전도 활동을 하가가 당시에는 불치병이던 폐결핵에 걸렸고, 1년간 투병하다가 이른 나이인 4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939년 6월 4일 당회장 최영택, 서기 정진철로 구성된 당회가 조직되었고, 1944년 이마태 전도사가 부임했다가, 부안동부교회의 순교자가 되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자, 당시 장로회신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마태 전도사는 한강을 헤엄쳐 건넌 후 걸어서 섬기는 전라북도 정읍 앵성교회로 내려갔다. 이어 교우와 가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전라북도 익산 한 산골의 처숙 댁으로 피신해 며칠 숨어 지냈다. 그러나 전라북도 부안 동진면 오중리에 사는 형님들 안부가 걱정되어 밤길을 걸어 형님 집에 갔다가, 잠복 중이던 좌익 청년들에 붙잡혀 일본인 농장 창고로 끌려갔다.

이마태는 1920년 정읍에서 이성렬 집사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이성렬 집사는 신앙이 매우 돈독했고, 자녀들 이름을 ‘주일’, ‘찬송’, ‘마태’, ‘찬양’ 등으로 지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왜경에 붙잡혀 매를 맞은 상처가 깊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마태가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형님들의 도움을 받아 전주성경학교에 입학해서 교역자 수업을 받았다. 25세에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큰형 이주일 집사가 섬기던 오중교회[부안동부교회 전신]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오중리는 150여 호가 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에서도 비교적 큰 동네였다. 현재의 부안동부교회인 오중교회는 전도사의 열정적인 목회에 힘입어 자립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는 좌익계 청년 세력이 매우 강해 불평불만자들을 규합하여 관공서나 교회에 불을 지르기도 했고, 지역 유지들을 테러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우익에서는 국민촉성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좌익 청년들에 맞섰다. 이마태 전도사는 국민촉성회 동진면 위원장을 맡아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들춰내고 좌익계 청년들을 설득하는 일도 했다. 이후 1949년, 이마태 전도사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면서 오중교회를 사임하고 앞서 언급한 앵성교회로 시무지를 옮겼다.

일본인 농장 창고로 붙잡혀 온 다음날 이마태는 동진면 내무서로 끌려가 혹독하게 취조를 받았고, 회유 불가능한 악질 반동으로 몰려 심하게 맞아 두 다리와 손목이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이후 치료도 못 받은 채 농장 창고에 몇 달을 갇혀 지내다 부안경찰서를 거쳐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9월 26일, 이마태는 교역자, 우익 애국 인사들과 함께 전주형무소 뒤뜰에서 죽창에 전신이 찔려 순교하였다. 당시 이전도사는 갓 서른의 앳된 청년이었고, 부안동부교회는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1947년 제3대 교역자 김창복 장로가 부임했고, 1948년 김종식, 이주일이 장로로 장립되었다. 1950년에 제4대 이공선 강도사 부임했고, 1951년 장동이가 장로로 장립되었다. 1954년 제5대 이창훈 전도사, 1957년 제6대 김정부 전도사가 각각 부임했고, 1958년 5월 25일 용서리 교회에서 이명[전입]한 김교선이 장로로 취임했다.

한국 장로교의 양대 주축인 합동과 통합은 같은 뿌리로서 신조와 교리와 정치가 하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9년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로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교단 분열의 여파로 교회가 나뉘는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에 다니던 아들 이일랑[은퇴 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주일 장로는 장동이 장로와 함께 WCC를 지지하는 통합 측에 속하기를 원했고, 정통 보수 신앙을 고수하던 김교선 장로와 김종식 장로는 WCC를 반대하는 합동 측에 속하기를 원했다.

교회가 한 지붕 두 가족 형태가 되어 갈등과 반목으로 시끄러워지자 김교선의 집에서 반대 측 교인들이 따로 모여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1년 후 지금의 교회 주차장에 있었던 창고로 옮겨 제일교회를 세웠고, 훗날 당시는 흔하지 않던 화강암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교회가 완전히 분열되고 말았다. 당시 교회 집기[풍금, 강대상 등]를 서로 빼앗는 과정에서 적잖은 마찰이 일어나, 무려 45년이라는 세월을 적대시하며 살아가는 불행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분열 후 동네 안쪽에 있던 오중교회가 1988년 지금 교회당 자리[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74-4]에 2층 벽돌집을 지어 이전했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오중제일교회와 나란히 서게 됨으로써 보는 이들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2001년 박영진이 교회 단일화라는 비전을 갖고 오중제일교회의 18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주도적으로 단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04년 말 양측 교회 장로 각각 3명씩 6인 위원회를 결성하여, 2005년 3월까지 단 3차례의 회동으로 분문 10조 부칙 2항의 단일화 추진 위원회 합의서를 도출했다. 3차 회의에서 전원 일치로 채택한 합의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4조 양 교회는 2005년 4월 16일까지 존속하기로 하고, 2005년 4월 17일부터는 하나의 교회로 통합하여 단일화된 교회로 새롭게 출발하기로 한다. 제5조 ①단일화된 교회는 초교파적 중립에 위치하기로 한다. 다만 교회가 안정되고 기반이 구축된 후 필요하다면 하나의 교단을 선택하여 가입할 수 있다. 제7조 ③단일화된 교회는 오중제일교회 박영진 목사를 담임 목사로 하며, 2005년 4월 17일부터 시무하기로 한다. ④단일화된 교회에서는 박영진 목사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교회 운영의 전권을 위임하기로 한다. 다만 특정 교파에 치우치지 않는 엄정 중립으로 목회해야 한다. 제10조 위 사실의 확인 증명을 위하여 각 위원은 본 합의서에 서명하고, 대표자 2인[김정언, 엄영진]이 1부씩 갖기로 한다.’

그 합의안에 따라 2005년 4월 17일 오중제일교회당에서 역사적인 단일화 예배를 보면서 두 교회가 분열 45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되었고, 하나가 된 교회 이름은 부안동부교회로 결정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교회 분열 후 대립과 반목으로 지역 주민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팽배했다. 이에 오중제일교회는 2003년 5월 9일, 이를 시정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오중, 팔왕, 덕신 마을 주민 47명[남자 16명, 여자 31명]이 참가한 지역 주민 경로 관광을 실시했고, 이어 교회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자 2003년 8월에 노인대학을 개설·운영하기 시작했다. 대학 교수의 강의와 함께 침술 봉사, 의료 봉사, 이미용 봉사 등 주민을 직접 섬기는 일도 병행했다.

2004년 4월에는 청와대를 관람했고, 계속해서 국회 의사당과 KBS 한국방송 등 노인들이 쉽게 가볼 수 없는 곳들을 견학했다. 2005년 이후로는 교회 단일화 다음 날의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2년에 한 번꼴로 중국, 일본, 태국, 대만 등에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2006년 2월에는 ‘건전한 가정과 사회를 지향하는 정책 개발 및 시행, 노인 복지에 관한 연구·교육·홍보 및 지원 사업, 노인 권익 증진을 위한 노인 복지 사업’ 등을 목적으로 부안동부복지회를 설립·운영하기 시작했고, 202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인 복지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현황]

부안동부교회는 제18대 박영진 목사를 비롯하여 장로 9명[시무 2, 원로 1, 은퇴 1, 명예 5], 안수 집사 5명, 권사 36명[시무 10, 은퇴 13, 명예 13]등 120여 명의 장년들과 20여 명의 주일 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사역의 집중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0개 위원회, 6개 구역, 4개 남녀 선교회를 조직·운영하고 있다. 예배 시간은 주일 낮 예배 오전 10시 30분, 찬양 예배 오후 2시 30분, 수요 예배 오후 7시 30분, 새벽 기도회 오전 5시 등이다.

주일 학교 낮 예배는 장년부와 함께 하고 있으며, 주일 오후 1시 30분에는 성경 공부 등 자체 모임을 갖고 있다. 부안동부교회는 2020년 4월로 설립 90년과 단일화 15년을 맞았다. 그리고 10년 후에 맞이할 교회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교회 활성화를 위해 박영진 담임 목사가 65세에 조기 은퇴하고 후임 목회자를 위해 동사 목사가 부임하여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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