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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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實相寺 |
영어공식명칭 | Silsang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실상길 122[중계리 16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경석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소속 사찰.
[개설]
실상사(實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지역의 4대 사찰 중 하나로서 6·25 전쟁 때 불탔다가, 1995년에 미륵전이 다시 건립되었다. 내변산(內邊山)의 직소 폭포로 가는 길 초입에 자리 잡고 있다. 내변산의 요해처(要害處)로서 주위가 온통 바위로 된 산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실상사는 통일 신라 때 초의 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하여 변산 지역의 모든 절을 거느렸다고 하나, 고려 시대의 기록은 전무하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상사가 변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 전기에는 운영되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청권집유(淸權輯遺)』에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실상사 삼존불상의 조성·중창에 관여한 것으로 전하고 있어, 당시 실상사가 왕실의 원당(願堂)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조선 전기의 실상사는 전결(田結)이 매우 많고, 높은 사격과 강한 사세를 유지하여 변산을 찾는 많은 문인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명소였다고 한다. 문인 심광세(沈光世)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실상사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이전의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19년(숙종 45)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록에는 실상사의 많은 승도가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어, 18세기 초에는 사세가 많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혁명 운동 당시 복장 유물(腹藏遺物)이 반출됐고, 1922년 내소사의 사적기에서 “대웅전에 여래입상을 세웠는데 입상의 높이가 칠척 여[약 212㎝]에 달해 유명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사세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규모가 컸던 사찰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소유 전답 대부분을 빼앗겼고, 광복 이후 6·25 전쟁 때에는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과 요사 등이 소실되었다. 과거 내변산 4대 사찰의 하나로서 고려 시대에 제작한 불상과 대장경 등의 소중한 유물들을 간직하기도 했던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이었다. 1995년 폐허가 된 실상사의 빈터에 미륵전이 다시 세워졌다.
[활동 사항]
사찰 중건을 위한 기와 불사 및 연등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과거에는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등이 있었으나 1950년 6·25 전쟁 때 모두 불타고 터만 남았다. 이후 1995년에 미륵전이 건립되었고, 뒤편에는 산신각이 조성되어 있으며, 요사채가 있다. 주지는 승려 지안이며, 신도 수는 300여 명 정도이다.
[관련 문화재]
실상사에는 고려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불상과 관음상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고려판(高麗版) 『화엄경소(華嚴經疏)』 등 귀중한 문화재도 있었다고 전해지나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등도 6·25 전쟁 때인 1950년에 화재로 모두 불타고 실상사는 터만 남게 되었다. 부안 실상사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고, 절터에는 3개의 부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2기의 부도만 남아 있고 종 모양이며 크기는 작다. 그밖에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없다.
특기할 만 한 점으로 「능가산 실상사 중창천인동발원책(楞迦山實相寺重創千人同發願冊)」에 따르면 현재 보물 제398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원래 실상사 불상의 복장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 왼편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원불교 제법성지(制法聖地)인 봉래정사(蓬萊精舍)가 있다.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절 옆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3년간 수도한 곳으로 원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