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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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澤永 |
영어공식명칭 | Go Taekyeong |
이칭/별칭 | 해강(海崗)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남해경 |
출생 시기/일시 | 1914년 7월 13일 - 고택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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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고택영 정읍 나용균 문중 재실 신축 공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고택영 서울 조계사 보수 공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고택영 괴산군 연풍면 정기용 박사 고택 보수 |
활동 시기/일시 | 1965년 - 고택영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보수 공사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 고택영 구례 화엄사 전각 해제 보수 공사 |
활동 시기/일시 | 1974년 - 고택영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
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고택영 전주 정혜사 보광전 중건 공사 |
활동 시기/일시 | 1991년 - 고택영 세종 비암사 대웅전 신축 공사 |
활동 시기/일시 | 1996년 - 고택영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신축 공사 |
활동 시기/일시 | 1997년 3월 24일 - 고택영 국가 무형 문화재 제74호[대목장] 기능 보유자 지정 |
활동 시기/일시 | 2001년 - 고택영 부안 실상사 복원 공사 |
몰년 시기/일시 | 2004년 12월 19일 - 고택영 사망 |
출생지 | 고택영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
성격 | 대목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국가 무형 문화재 제74호 대목장 |
[정의]
부안 출신으로 우리나라 현대의 대표적인 대목장.
[개설]
대목장(大木匠) 은 목재를 재료로 하여 집을 짓는 목수이다. 목재를 같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문짝이나 가구, 액자 등 소규모 목공일을 주로 맡는 소목장(小木匠)과 구분된다. 전통적으로 목조 건물을 지을 때에는 와장(瓦匠), 드잡이공[기울거나 내려앉은 구조물을 해체하지 않고 도구를 이용해 바로잡는 일을 하는 사람], 석장(石匠), 미장이, 단청장 등과 힘을 합하여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 설계부터 공사의 감리까지 책임지고 완성시켜야 하므로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활동 사항]
해강(海崗) 고택영(高澤永)[1914~2004]은 1914년 7월 13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에서 태어났다. 11세인 1924년까지 한문을 수학하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줄줄 외며 도장을 파고 장기판을 만들던 학동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너덧살 적에는 공작을 잘했어. 잔 나뭇가지를 가지고 옛날 쟁기도 짜고 함석으로 벼 달아 마당에서 논도 갈고, 글을 읽다가도 수숫대로 집을 지어 놀았응게”라고 저술에서 이야기할 정도였다.
같은 마을에 당시 목수 조합장을 지내던 목수이자 당숙인 고은천이 살고 있었다. 1941년 당시 ‘목수는 배고픈 직업’이라 하여 당숙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크면 목수가 되려나” 하는 주위의 칭찬을 듣던 고택영은 고은천을 따라 목공일을 시작하였다. 부안의 큰 목수 심태점(沈太点)이 우연히 27살의 고택영이 연장 다루는 솜씨를 보더니 ‘10년 한 사람보다 잘한다’며 함께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목수일이 그저 좋았던 고택영은 이후 도목수 심태점, 심사일(沈士一), 이한기(李漢基)에게서 한옥 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42년 정읍 나용균(羅容均)[1895~1984, 전 국회부의장]의 문중에서 재실을 짓는 데 참여하여 목수의 자질을 인정받고 본격적으로 목수 수업을 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1954년 고택영은 서울로 올라와서 목수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조계사 보수 공사에 참여하여 궁중 목수의 전통을 계승한 스승 조원재(趙元在)[1903~1976]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택영은 조계사에서 꽃살문 짜는 일을 하였는데 솜씨를 인정받아 남대문 등의 공사에도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건축에 대한 전통 기법인 설계도면 작성법, 먹줄 치는 법, 나무 깎는 법, 선자연 거는 법 등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정기용(鄭寄鎔) 박사 고택을 보수하면서 배희한(裵喜漢)[1907~1997] 대목장을 만났다. 고택영은 배희한으로부터 한옥 건물의 해체 및 조립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또한 고건축 기술을 연마하면서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배운 한문 지식을 기초로 좌향(坐向)과 장풍(藏風) 등의 기본 배치 원리를 배웠다. 그리고 김복술에게 좌향론(坐向論)을 배워 집터 잡는 법을 깨우치고 본인이 이를 정리하여 양지배합생기법(陽地配合生氣法)이라는 이론을 세우고 선현들이 지어 놓은 집과 명당을 찾아다니면서 본인이 세운 이론을 확인하였다. 이후 1965년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보수 공사, 1970년 구례 화엄사 대웅전·명부전·천왕문·금강문 해체 보수 공사, 1974년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1986년 논산 관음사 대웅전 신축 공사, 1991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당시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碑巖寺) 대웅전 신축 공사, 1996년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신축 공사 등 문화재급 고건축 공사를 맡아 진행하였다.
고택영은 작업하는 과정에서 ‘한옥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여 제자들에게 ‘순리대로 건축하라’는 말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무리하게 땅을 파고 나무를 베어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심지어는 포크레인으로 터를 파는 것도 반대하였다. 특히 처마 곡선을 강조하여 제자들에게 “처마는 건물의 생명이고 곡선은 유연해야 한다. 그래서 처마 모서리에서 내포까지 45도 각도가 맞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일례로 1988년 전주 정혜사 보광전 중창 공사를 시작할 때 주지 혜일 스님은 165㎡[50평]짜리 법당을 세우고 싶어 하였으나 주변 산자락과의 조화를 중시하여 129㎡[39평]로 맞추어 건축하고 문살은 통나무로 그대로 짜 맞추었다. 지금도 보광전은 주변 산자락과 어울리는 유려한 처마 곡선으로 유명하다.
고택영은 생활에 있어서도 목수의 자부심과 금전보다 일에 대한 욕심을 강조하였다. 제자들에게 “나무 깎아서 돈 벌 생각하면 제대로 일 못한다. 목수가 돈에 욕심 내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돈이 아니라 일에 욕심을 내야 한다. 좋은 재료로 집을 짓고 상량문에 이름 석 자 남기는 것도 고맙다.” 라고 강조하였다. 실제로 후손의 구전에 의하면, 공사가 끝난 뒤에 건축비가 남았으면 건축주에게 전화를 하여 ‘돈이 얼마 남았으니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고택영은 목수일을 사랑하였으며 청빈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고택영은 목수 기술을 인정받아 1997년 대목장이었던 고 조원재, 고 이광규(李光奎)[?~1982], 고 배희한의 뒤를 이어 1997년 3월 24일 국가 무형 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01년 부안 실상사 복원 공사를 주관하였다. 2004년 12월 19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60여 년 동안 문화재급 고건축 공사 현장을 지키며 목수로서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목장 중 한 사람이다. 전국에 약 100여 건, 150여 채의 고건축들이 고택영의 손길을 거쳐 되살아나거나 새로 지어졌다. 불교 건축으로는 영암 도갑사 해탈문,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강화 전등사 원통전, 구례 화엄사 대웅전,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전주 정혜사 보광전, 승주 송광사 국사전,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등이 있고, 일반 건축으로는 서울 남대문과 경복궁,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등이 있다. 고택영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문하생으로는 김인선, 전명복, 장춘종, 김영성, 이의찬 등 20여 명이 있으며 이들은 해강회(海崗會)를 조직하고 대목 기술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