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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92
한자 朴永根
영어공식명칭 Bak Yeonggeu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형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58년 9월 3일연표보기 - 박영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81년 - 박영근 작품 활동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84년 - 박영근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 출간
활동 시기/일시 1987년 - 박영근 민중문화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87년 - 박영근 시집 『대열』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93년 - 박영근 시집 『김미순 전(傳)』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94년 - 박영근 시집 『김미순 전(傳)』으로 제12회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
활동 시기/일시 1998년 - 박영근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 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2000년 - 박영근 인천민예총 사무국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2002년 - 박영근 인천민예총 부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2002년 - 박영근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뜨는가』 발간
활동 시기/일시 2002년 - 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발간
활동 시기/일시 2002년 - 박영근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2003년 - 박영근 제5회 백석 문학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2004년 - 박영근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2004년 - 박영근 시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 발간
몰년 시기/일시 2006년 5월 11일연표보기 - 박영근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7년 - 박영근 유고 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발간
추모 시기/일시 2009년 - 박영근 첫 시선집 『솔아 푸른 솔아』 발간
추모 시기/일시 2012년 9월 1일 - 박영근 추모 박영근 시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16년 5월 11일 - 박영근 추모 『박영근 전집』 발간
출생지 박영근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영근 거주지 - 인천광역시 부평구
학교|수학지 마포초등학교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전주고등학교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권삼득로 2[중노송동 449-1]
활동지 민족문학작가회의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로 128[성산동 275-3]
묘소 초동교회 공원 묘원 -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음촌길 36-77[배태리 582-1]
성격 시인
성별
대표 경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정의]

부안 출신의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자 시인.

[개설]

민중가요를 넘어 국민적 애창곡이 된 가수 안치환이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시 저작자였던 박영근 시인, 그는 노동 현장의 체험을 담은 시들을 구호보다는 서정으로 표현하면서 노동의 현실을 고민했던 부안 출신의 시인이었다.

[활동 사항]

박영근(朴永根)[1958~2006]은 1958년 9월 3일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에서 태어났다. 부안이 낳은 작가지만 정작 고향인 부안에서는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찍이 다니던 명문 전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제도권 교육에 실망했던 박영근은 군 제대 후 구로공단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노동자로 살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고, 동인지 『말과 힘』을 발간했다.

그러다 1981년 동인 시집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흔히들 박영근을 ‘최초의 노동자 시인’으로 불렀다. 실제로 박영근 시인의 뒤를 이어 1980년대 박노해, 백무산, 김해화, 김기홍 등 노동자 출신 시인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노동 문학’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초석이 되어준 셈이다. 1984년에 출간한 박영근 시인의 첫 시집인 『취업 공고판 앞에서』는 현장 노동자 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여 노동자들이나 대학가에서 인기가 많았다. 특히 이 시집에 수록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안치환 작곡의 민중가요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중략)/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후략]”

-박영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백제(百濟) 6」

박영근은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그리고 1985년에는 노동 문화패 두렁에 참여해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87년~1989년 민중문화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94년 시집 『김미순 전(傳)』으로 제12회 신동엽 창작 기금을 받았다. 1998년~200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2001년 인천민예총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어쩌면 2002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다섯 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가 간행되도록 박영근은 평생을 도시의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세상에 절망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오직 물질로만 계산되는 세상 앞에서 술에 취해 울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영근 시인은 2003년 백석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2002년부터 작고하기 직전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눈물과 깊은 서정성이 밴 시를 뿜어내며 지친 몸과 마음을, 그리고 세상을 달랬다. 결국 폐결핵으로 몸이 망가져 갔지만, 병원에 갈 생각은 없었다.

상태가 위독해져 주변인들이 억지로 떠메어 가다시피 하여 병원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06년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이 박영근 시인의 사인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박영근 시인의 행동을 보고 ‘소극적 자살’로 얘기하곤 했다. 안타까운 점은 4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혼신을 다해 살아낸 노동 문학의 초석을 고향인 부안에서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에서 태어나고 마포초등학교를 다녔음에도 고향 마포리뿐만 아니라 부안에는 박영근 시인의 시비는 말할 것도 없고 변변한 기념사업도 전무한 상태다.

반면 박영근 시인이 말년에 거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천광역시 부평구는 부평구청 옆 신트리 공원에 시비 부지를 제공하여 2012년 박영근 시비가 건립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리고 매년 선후배 문인들이 모여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물론 이후 박영근 시인의 고향 모교에서도 몇 차례 문학 추모제를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저술 및 작품]

“좋은 시는 울림이 크고 가슴에 오래 그 향기를 남긴다. 『지금도 그 별은 눈 뜨는가』가 그렇다.” 정희성 시인이 박영근 시인의 시집을 읽고 한 말이다. 박영근 시인이 남보다 많이 울고 남보다 깊이 삭여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4년 출간한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로 현장 노동자 시인이 끌고 가는 노동 문학의 뿌리를 심어 놓고, 1980년대 그 험난한 세상과의 끈질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채 머나먼 길을 떠났으니 왜 아니겠는가.

부안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줄곧 현장에 나가 노동자로 일했던 박영근 시인이다. 1981년 동인 시집 『반시』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그에 힘입은 노동자 시인이나 노동 문학이라는 말은 이 땅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아니면 박영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불어 정작 노랫말을 만든 박영근 시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면면히 들여다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영근이 태어난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는 농촌이었다. 이 때문에 박영근은 민중의 삶이 주체가 된 민중 공동체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박영근의 시어들이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노동자의 성장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픔을 담고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서정적이기까지 한 시 구절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박영근의 미발표 작품들을 보면 서사적인 구조와 음률이 있는 장시를 통해 형식상의 실험을 지속적으로 해왔음 또한 알 수 있다. 상징적 메시지와 형식의 결합으로 노동시의 미학적 완성도를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이다. 그렇게 역사와 자신에게 정직하게 맞서며 시인의 길 또한 치열하게 걸어온 것이다. 이로써 한국 노동시가 한 단계 성숙한 것도 정치성과 문학성을 끊임없이 조율했던 박영근 작품의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첫 시집 이후 발간한 두 번째 시집 『대열』[풀빛, 1987], 세 번째 시집 『김미순 전(傳)』[실천문학사, 1993], 네 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뜨는가』[창비, 2002]에 이어 2002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와 같은 작품들이 다 그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20여 년에 이르는 박영근 시인의 시적 도정이야말로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21세기의 정신사적 지평에까지 줄기차게 심화, 확대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81년 노동시를 통해 시단에 이름을 등재한 이래 신동엽 창작 기금을 수혜하고, 민족의 역사적 지평으로 그의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시대적 허무의 밑바닥까지 파헤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고뇌에 도달한 네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길은 아니었다. 작고하기 2년 전 간행한 시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에서도 가장 눈부신 자기 성취를 보여주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사는’ 사람이었던 시인 박영근은 유고 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비, 2007]와 첫 시선집 『솔아 푸른 솔아』[강, 2009]에 이어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가 추모 10주기에 맞추어 2016년 『박영근 전집』[실천문학사]을 발간한 것도 그런 도저한 시인의 시 세계를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음촌길 36-77 초동교회 공원 묘원에 있다. 박영근 시인이 평생 몸담았던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주관하여 66명 규모의 장례 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2년 9월 1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신트리로 21 신트리 공원에 박영근 시비를 건립하였다. 보령 오석으로 만든 시비 앞면에는 박영근 시인의 대표 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원문을 육필로 새겨 놓았다. 뒷면에는 박영근 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선후배 문인들로 구성된 시비 건립 위원회에서 쓴 건립문이 새겨져 있다.

시인이 서둘러 먼 길 떠난 뒤 그의 빈자리가 주는/ 씁쓸함을 달랠 길 없던 벗들이, 생전에 시인이/ 틈틈이 찾아와 거닐곤 하던 이곳에 시비를 세우니,/ 시인이 남기고 간 빼어난 시편들과/ 올곧은 시 정신이 길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2012년 9월 시비 건립문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는 해마다 ‘박영근 시인 추모제’가 열린다. 2020년 7월 18일은 14주기 추모 행사와 더불어 제6회 박영근 작품상 시상식을 박영근 시비가 있는 부평구청 옆 신트리 공원에서 개최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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