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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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夕汀 |
영어공식명칭 | Sin Seokjeong |
이칭/별칭 | 신석정(辛錫正),석정(釋靜),석정(石汀),석정(汐汀),석지영(石志永),소적(蘇笛),호성(胡星)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미 |
출생 시기/일시 | 1907년 7월 7일 - 신석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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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0년 3월 - 신석정 조선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불전 연구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신석정 전주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임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 신석정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68년 - 신석정 한국 문학상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73년 - 신석정 제5회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7월 6일 - 신석정 사망 |
출생지 | 신석정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03-2 |
학교|수학지 | 부안공립보통학교 - 전라북도 부안군 |
학교|수학지 | 중앙불교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
묘소 | 신석정 묘소 -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역리 |
성격 | 시인|교육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월(寧越) |
대표 경력 | 전주고등학교 교사 |
[정의]
부안 출신으로 한국 시단에서 독특한 서정 세계를 구축한 시인.
[활동 사항]
신석정(辛夕汀)[1907~1974]의 본관은 영월이며, 본명이 신석정(辛錫正)이고, 아호는 석정(夕汀·釋靜·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호성(胡星)·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1907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03-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신석정 시인은 한평생 잔잔한 정서를 담은 목가적인 전원 시인이다. 구한말 간재 전우(田愚) 아래서 유학을 배운 아버지 신기온(辛基溫)과 어머니 이윤옥(李允玉)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11세의 나이로 부안공립보통학교[현 부안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다. 부안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3년 만경 출신 박소정(朴小汀)과 혼약을 맺었다[실제 성혼은 1926년].
1930년 3월 상경해 동대문 밖 대원암(大圓庵)이라는 암자에 있던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들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 더불어 당대 거벽으로 추앙받던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선사에게 불전(佛典)을 배웠다. 그 무렵 한국 불교계의 사상적 지도자라 할 수 있었던 박한영의 수많은 제자 중에는 문인들도 상당수였다. 그 중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홍명희(洪命憙)·정인보(鄭寅普)·조지훈(趙芝薰)·서정주(徐廷柱) 등이 있었다. 물론 신석정 시인이 불전을 배운 이유는 순전히 학문으로서였다.
승려들을 규합해 『원선(圓線)』이라는 회람지를 돌려 읽기도 했다. 그 때 만난 문학 인맥은 부안과 전주를 떠나지 않고 살면서도 ‘시문학파’ 시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주게 되었던 것이다. 시문학파는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시인의 출자로 만들어진 시 동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활약한 시인들을 말한다. 신선한 비유와 회화적인 이미지로 한국 문학사에 족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3회 발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석정이 1931년 10월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올리게 된 직후였다.
신석정 시인은 1935년 2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기 전까지 그렇게 서울에 머물렀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부안 선은동에 집을 한 채 지었는데, 옥호를 ‘청구원(靑丘園)’이라 지었다. 평소 자연을 사랑하였기에 집 안팎으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 은행나무와 벽오동, 목련, 산수유와 철쭉, 신우대, 등나무 등 없는 나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무들이 무성해지자 박새며 동박새, 비비새, 곤줄박이 등 작고 귀여운 새들도 날아와 둥지를 틀어 새끼를 치곤 했다. 이름처럼 ‘푸른 언덕의 정원’답게 시인이 26세 때 지었다는 이 집은, 수수하고 아담하여 담백한 멋이 감돈다. 창호지를 바른 창을 열면 유리문으로 이중 장치가 된 창틀이 돋보이는 집. 시인은 이 곳에서 주경야독으로 시작(詩作)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시집 『촛불』과 『슬픈 목가』를 발간했다.
신석정 시인은 망국의 한을 좇아 일신의 입신양명보다는 시문의 길을 걸었다. 평생을 자연과 생활을 노래하고 벼루와 붓, 한지를 곁에 두고 살았기에 그의 시에는 묵향(墨香)이 진하게 남아 있다. 당시(唐詩)를 좋아하여 자연 속에서 당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되기를 꿈꾸었으나, 시대적으로 은사(隱士)로 살 수 없었던 가혹한 시기에 태어나 수많은 서정시를 남겼다. 일제 말기에 검열을 피해 발표 없이 시 창작만을 계속해오다 광복이 되어서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를 발표하였는데, 광복 이후에는 현실 참여 정신과 역사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썼다.
광복과 6·25를 겪으며 신석정의 시정신은 저항시로 나아갔지만, 서정의 면모는 그대로 이었다. 그렇게 일생을 부안과 전주에 머무르며 무려 1,5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지용(鄭芝溶)·박용철(朴龍喆)·김기림(金起林)·김영랑(金永郞)·이하윤(異河潤) 등 서울의 기라성 같은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시문학파’로 활동하기도 했다.
청구원에는 훗날 『서울 신문』 출판국장을 지냈던 장만영(張萬榮)이나 서정주 등 많은 문인들이 찾아들었다. 특히 장만영 시인은 청구원에서 신석정 시인의 처제와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또한 신석정은 면서기와 군서기를 거쳐 일제가 식량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마련한 조선식량연단에서 일했다. 그러나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드물게 대가 강한 시인이었다. 한번은 정신대로 보낼 여성 50명을 모집하라는 상부 지시가 담긴 공문서를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내부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다행히 얼마 후 광복이 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청구원은 시인이 전주로 이사 갈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1952년 전주시 남노송동 ‘비사벌 초사(艸舍)’로 이사할 무렵에는 전주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임해 있었다. 비사벌 초사 또한 청구원과 다를 바 없이 각양각색의 화조와 나무들을 심어 마치 식물원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집에서 197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22년 동안 거주하였다. 시집 『빙하』와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와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도 이 곳에서 썼다.
신석정 시인은 시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한시에서 시적 감성을 길어 올려 시 창작의 에너지로 삼았다. 한시 번역도 하여 교과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향리 출신 이매창(李梅窓)의 시를 번역하여 그녀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새롭게 부각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24년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첫 작품 「기우는 해」를 『조선 일보』에, 1931년 「선물」을 『시문학』 제3호에 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연이어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한국 시사(詩史)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다졌다. 그리고 첫 시집 『촛불』[인문사, 1939], 『슬픈 목가』[낭주문화사, 1947], 『빙하』[정음사, 1956], 『산의 서곡』[가림출판사, 1967], 『대바람 소리』[문원사, 1970] 등 총 5권의 시집을 간행했다. 가람 이병기(李秉岐) 시인과 공저한 『명시조 감상』[박영사, 1958], 『한국 시인 전집』[신구문화사, 1959], 번역서 『중국 시집』[정암사, 1954] 등이 있다. 이밖에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작과 비평사, 2007],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지식산업사, 1974] 등이 있다.
[묘소]
신석정 시인은 1974년 7월 6일 작고했을 당시, 고향인 부안에 있는 선산이 아닌 생전에 휴양지로 삼았던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신월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신씨 문중이 묘지 이장을 추진하여 2000년 3월 29일 비로소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역리의 선영 가족 묘지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신석정이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전원 시인’이나 ‘목가 시인’이란 호칭이 따를 만큼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면서, 시세계가 지닌 서정적 깊이와 치열한 역사의식, 현실 참여의 정신이 살아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1958년 전라북도 문화상, 1968년 한국 문학상, 1973년 제5회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