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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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永日 |
영어공식명칭 | I Yeongil |
이칭/별칭 | 춘헌(春軒)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당산로 71[서외리 177]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장순순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 이영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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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이영일 부안 면장 사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이영일 영명학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이영일 전라북도 부안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1월 8일 - 부안공립중학교 인가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9월 1일 - 부안농림중학교에서 부안중학교로 개칭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이영일 낭주학원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 이영일 사망 |
출생지 | 이영일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
거주|이주지 | 이영일 거주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당산로 71[서외리 177] |
활동지 | 이영일 활동지 - 전라북도 부안군 |
성격 | 교육가|육영 사업가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경력 | 부안 면장|부안미곡상조합 조합장 |
[정의]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교육가이자 육영 사업가.
[개설]
이영일(李永日)[1894~1953]은 교육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여러 학교들을 세운 교육가이자 육영 사업가이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헌(春軒)이며, 아버지는 이득중(李得仲)이다.
[활동 사항]
이영일은 1894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출중했고,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 능통했다고 한다. 1933년 부안 면장직을 사직한 이후로 전라북도 부안미곡상조합(扶安米穀商組合) 조합장으로 재직했다. 아버지 이득중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본인도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빈민 구제와 인재 양성 등을 위해 많은 재산을 기부하였다.
당시 『동아 일보』에서는 1934년 5월부터 1936년 6월까지 총 7회에 걸쳐서 이영일의 기부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1934년 6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上西面)의 궁민(窮民)을 위해 벼 100석을 기부했고, 부서공립보통학교에 100원을 기부했다. 1935년에는 농촌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해 2만 원 상당의 토지를 제공하여 간이 농업 학교 설치에 기여했다. 또한 인재 양성을 위해 써 달라고 전북육영회(全北育英會)에 2,000원을 기부했고, 면장 사임 후 숙원 사업 해결을 위해 써 달라고 2,000원을 기부했다.
교육 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36년에 사재를 털어 현 부안중학교 자리에 영명학원(永明學院)을 설립했다. 지역 농민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1936년에 시가 3만 원의 사유 토지 99,173.55㎡와 현금 등 4만 원~5만 원 상당의 거액을 들여 설립한 것이었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전답 991,735.53㎡를 희사하여 부안중학교를 설립했고, 1949년에는 약 132,231㎡ 규모의 부지와 실습지를 쾌척하여 부안농립고등학교[현 부안제일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지역의 여성 교육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1952년에 당시 벼 800석 분이던 거금 1200여만 원을 쾌척하여 여성 교육 개발에 뜻을 같이한 백주(白州) 김태수(金泰秀)를 비롯한 몇몇 지역 독지가들과 함께 낭주학원을 설립했다. 낭주학원은 1953년 개교한 부안여자중학교와 1961년에 개교한 부안여자고등학교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영일은 1953년에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성황산(城隍山)의 서림 공원에 있는 비에 쓴 ‘죽림 공원(西林公園)’이라는 글씨가 이영일의 필적이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당산로 1[서외리 410-1]의 부안중학교에 신익희(申翼熙)[1894~1956]가 직접 쓴 이영일 송덕비가 있으며, 부안읍 성황산에도 1987년에 세운 이영일 송덕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