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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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泰鍾 |
영어공식명칭 | Gim Taejong |
이칭/별칭 | 김아(金鴉)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철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 김태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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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김태종 민선 부안 읍장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김태종 조선공산당 부안군당 조직부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김태종 남로당 부안군당 책임 비서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3월 22일 - 김태종 부안군 3·22 총파업 책임자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김태종 전라북도 정치보위부 책임자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1952년 - 김태종 유격대 6지대장으로 전라북도 완주와 덕유산에서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52년 7월 21일 - 김태종 사망 |
출생지 | 김태종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월포 |
거주|이주지 | 김태종 거주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15 |
활동지 | 김태종 활동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
묘소 | 김태종 묘소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고마제윗길 91-34[내기리 530]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소설가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경력 | 부안 읍장|남로당 부안군 책임 비서|유격대 6지대장 |
[정의]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소설가.
[개설]
김태종(金泰鍾)[1911~1952]은 부르주아(bourgeois)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사진을 찍고 소설을 썼던, 신문화에 관심이 많은 예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다. 광복 후 민선 부안 읍장을 지냈고, 남조선 노동당[남로당(南勞黨)] 부안군당 책임도 맡았다. 1947년에 전라북도 부안에서 24시간 총파업인 3·22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후 전라북도 부안을 떠났다가 6·25 전쟁 때 정치 보위 책임자로 전주에 왔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덕유산(德裕山) 일대에서 유격대 6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피살되었다.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김아(金鴉)이다. 아버지 김중욱(金仲旭)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의 2남 1녀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김봉욱(金鳳旭)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김태종은 1911년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월포[현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월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경상남도 밀양에서 살다가 양자로 입양되며 전라북도 부안에서 살았다. 전라북도 부안의 서부 바닷가 하서면 월포와 하서면 백련리 의복동 등에 많은 농토가 있었다. 가난한 자들의 소작료를 줄여주고, 농민에게 자신의 토지를 돌려주었으며, 하서의 월포 해변가에 면한 땅들은 동네에 기증했다. 김태종의 선정을 기념해서 농민들이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에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전라북도 부안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신석정(辛夕汀)이었고, 신석정 시집 「촛불」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소설을 써서 여러 신문사에 기고도 했고, 전형적인 부르주아 출신 지식인이었지만 무산 계급의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했다. 신문화를 선도하며 천체 만원경, 등산 장비를 갖추고 자주 변산(邊山)을 등반했고, 각종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암실을 만들어 사진을 인화·현상하기도 했다.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는 선구적인 활동이었다.
광복 후 민선 부안 읍장으로 선출되었고,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했다. 1946년 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실상길 122[중계리 164]의 내변산 실상사(實相寺)에서 열렸던 부안군당 1차 당 대회에서는 조직 부장을 맡았다. 당시 책임 비서는 김복수(金福洙)였다. 1946년 노동당 개편 때는 부안군 책임자가 되었다. 1947년 3월 22일 남로당에서 전국의 지하 조직과 당원들에게 24시간 총파업 지시를 내렸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단순한 총파업에 그치지 않고 남로당이 당력을 모아서 경찰과 대치하는 군민 항쟁의 모습을 보였다. 이후 좋은 시절이 오면 사진관이라도 하겠다는 말을 부인에게 남기고 부안을 떠났고, 6·25 전쟁 때 정치 보위 책임자로 전주에 왔었다고도 전해진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덕유산 일대에서 유격대 6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2년 7월 21일 피살되었다.
[저술 및 작품]
김태종이 찍은 사진이 다수 있으며, 「자유일기」[1936]가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고마제윗길 91-34[내기리 530]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