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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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日鎔 |
영어공식명칭 | Sin Ilyong |
이칭/별칭 | 장일성(張日星),적소(赤笑),명항(明恒),혜성(慧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안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
[개설]
신일용(辛日鎔)[1894~?]은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했다. 1922년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조직했고, 『신생활』 창간 이후로는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한 글들을 기고했다. 1922년 『신생활』이 사회주의 사상을 퍼트린다 하여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1925년 『조선일보』 기자가 된 이후 집필한 사설이 문제가 되어 검거되었다가 기소 중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북만주로 망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명항(明恒), 호는 혜성(彗星)이다. 영월 부원군(寧越府院君) 신온(辛蘊)의 23세손이고, 아버지는 신기수(辛基洙)이다.
[활동 사항]
신일용은 1894년(고종 31)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목포와 제주도의 기독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9월 전라북도 전주에서 병원을 개원하였다. 1922년 2월 이영(李英), 장병천(張炳天), 심상완(沈相完) 등과 사회주의 단체인 신인동맹회를 조직했고, 김한(金翰), 박일병(朴一秉), 신백우(申伯雨)와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3월 초에 창립된 잡지 『신생활』 창간호에 「부인 문제의 일고찰-자유사상과 현모양처주의」를 기고해 기존의 여성관을 벗어나 사회주의에 입각한 여성 문제를 논하였다.
1922년 11월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 받았다. 신생활사 기자를 겸하면서 『신생활』 11호를 ‘러시아 혁명 제5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로 간행하여 「신문지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1925년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하의 사설을 집필했다가 검거되었다가, 경성지법 검사국에서 기소 중지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상하이[上海]를 거쳐 지린[吉林]으로 망명하여 광동병원을 운영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사회주의 운동 관련 글을 기고했고, 1928년에는 신민부 중앙 간부가 되어 민족 유일당론을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여러 차례 재건 운동에 실패하여 와해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 재건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에서 김철수(金綴洙), 윤자영(尹滋瑛), 김영만(金榮萬), 김영식(金泳植)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만주부 중앙 위원, 재민한인반제국주의동맹 간부가 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193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3년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광복 후 1946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중앙 집행 위원으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