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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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承憬 |
영어공식명칭 | Son Seunggyeong |
이칭/별칭 | 사오(士悟),초은(楚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아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의병.
[개설]
손승경(孫承憬)[1540~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慶基殿)[사적 제339호]의 태조(太祖) 어진(御眞)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존하는 데에 힘썼으며, 왜적과 싸우다가 양성(陽城)[현 경기도 안성]에서 전사하였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오(士悟), 호는 초은(楚隱).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손비장(孫比長)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한림 손홍적(孫弘績)이다.
[활동 사항]
손승경은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백고(伯顧) 기효간(奇孝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宣祖) 연간에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평안도 위원(渭源)[현 자강도 위원군]에 유배되어 죽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출사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정읍의 초산(楚山)으로 이사하여 은거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 해 6월 왜군이 전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손승경은 당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오희길(吳希吉), 종숙(宗叔) 손홍록(孫弘祿)과 함께 경기전에 보관하고 있던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정읍 내장산의 용굴암(龍窟庵)[전라북도 기념물 제130호]에 옮겨 보존하였다.
이후 손승경은 중봉(重峰) 조헌(趙憲)이 승병 영규(靈圭)와 힘을 합해 금산에서 왜군을 맞이하여 싸우다가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가동(家童)을 이끌고 양성[현 경기도 안성]으로 달려갔고,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가동 차곡석(車曲石)과 이악금(李岳金)이 손승경이 순절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진으로 나아가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기우만이 지은 손승경의 묘갈명에 따르면, 당시 손승경의 옷과 신발을 수습하여 정읍 용호동(龍虎洞) 앞 등성이에 묻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손승경은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번지]에 있는 이산묘(駬山廟)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