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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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億鑑 |
영어공식명칭 | Gim Eokil |
이칭/별칭 | 중임(重任),만휴당(晩休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아 |
출생 시기/일시 | 1544년 - 김억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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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김억일 장악원 주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억일 창의 |
몰년 시기/일시 | 1604년 - 김억일 사망 |
몰년 시기/일시 | 1623년 - 김억일 신원 |
추모 시기/일시 | 1874년 11월 27일 - 김억일 이조 참의 추증 |
출생지 | 부안현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장악원 주부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의병.
[개설]
김억일(金億鑑)[1544~1604]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가계]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중임(重任),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영무(金英武)이다.
[활동 사항]
김억일은 지금의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 효자로 천거되어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사직(司直)으로 옮겨졌다. 당시 세자 책봉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나자 김억일은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해서는 안 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제주(濟州)에 유배되었다가 삼사(三司)에서 요청하여 3년 만에 방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김구일(金九鎰), 아들 김극온(金克溫)을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의논하자는 편지를 보냈으며, 김제민과 더불어 장성(長城) 남문에서 창의하였다. 이때 김억일은 가동(家童) 수십 명과 수십 석의 군량미를 내놓았으며, 직접 의병을 이끌고 직산(稷山)까지 이르러 전투를 하였으나 전황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집으로 돌아갔다.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1588년(선조 21)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과 구사맹(具思孟), 윤신지(尹新之) 등과 세심대(洗心臺)에서 노는데 세심대 아래에서 방황하는 중이 있었다. 이에 김억일이 그 중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염탐꾼이 아니냐?” 하니 그 중이 도망갔다. 좌우에서 연유를 묻자 김억일은 “천시(天時)는 이미 액운을 만났다.”고 탄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와 아들을 장성 갈재로 보내 왜의 밀정을 죽이게 하였다. 그때 김억일은 집에 있었는데 밤중에 중 하나가 나타나서 그의 오른팔을 찔렀다. 이는 세심대에서 일어났던 일로 그를 미리 제거하려는 계략이었다고 하며, 팔이 부러진 김억일은 의거(義擧)에 동참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김억일이 사망한 후 광해군 연간에 그에게 내려진 순효비(純孝碑)가 조정의 명에 따라 헐렸고, 『삼강행록(三綱行錄)』에서 이름이 지워졌으며,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혔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집의(執義) 김존경(金存敬)이 상소를 올려 신원되었다. 1828년(순조 28) 10월 9일 효자와 충신들에게 정려를 내리면서 “고(故) 주부 김억일의 순효비를 다시 세우라.”고 하였고 1874년(고종 11) 11월 27일 조정에서 충절을 기리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추증하였다.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1길 70-7[모현리 302-2]에 있는 오산사(鰲山祠)에 배향하였다. 김제민의 손자 태천(苔川) 김지수(金地粹)가 행장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