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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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馨遠 |
영어공식명칭 | Yu Hyeongwon |
이칭/별칭 | 반계(磻溪),덕부(德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622년 - 유형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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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3년 - 유형원 은거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유형원 진사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673년 - 유형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6년 8월 27일 - 유형원 선생 묘 경기도 기념물 제32호 지정 |
출생지 | 유형원 출생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유형원 이주지 - 강원도 원주시 |
거주|이주지 | 유형원 이주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화곡마을 |
거주|이주지 | 유형원 이주지 - 경기도 여주시 백양동 |
거주|이주지 | 유형원 이주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
묘소|단소 | 유형원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 |
성격 | 학자|실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문화(文化) |
[정의]
조선 후기 부안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 유위(柳湋)는 현령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진사시에 합격한 후 정랑(正郞)을 지냈다. 아버지 유흠(柳𢡮)은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다가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어머니는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부인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沈守慶)의 증손녀이자 부사 심은(沈誾)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유형원은 1622년 한성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나이 겨우 두 살 때 아버지가 역모에 연루되어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15세 때인 1636년(인조 14)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다가 이듬해에는 지평현 화곡리(花谷里)[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화곡마을]로 이사했으며, 다음 해에는 여주 백양동으로 이사하였다. 또한 20대의 젊은 시절에는 할머니, 어머니, 할아버지의 상을 연거푸 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과거 공부를 하지 못하여, 165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결국 문과 급제에는 실패하였다.
유형원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부안으로 내려가 20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학문 연마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隨錄)』과 같은 명저가 나온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불운한 가족사와 시대와의 불화가 유형원의 세속적인 출세를 가로막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좀 더 예리한 통찰력을 기를 수 있었던 셈이다. 유형원의 학문은 “실학(實學)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또한 학계의 일각에서는 유형원의 사상이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진보는 결코 근대 지향적인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유교적이며 전통적인 규범의 범위 내에서 존재하는 성격의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하고 있다.
[학문과 저술]
유형원은 다섯 살 때부터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을 모시고 공부를 하였다. 이원진은 안산의 첨성리에 은둔하면서 경세실용(經世實用)의 학문을 추구했던 이익(李瀷)의 당숙이었다. 이익은 유형원이 죽은 뒤에 태어났지만, 불운한 재야의 인물이면서 현실 제도의 개혁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김세렴은 광해군 때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간 뒤에 함경도와 황해도의 관찰사, 그리고 호조 판서를 역임했으며,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유형원의 학문 세계는 그가 1653년(효종 4) 32세의 젊은 나이로 부안 우반동[현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은거한 이후 죽을 때까지 20년 간 이곳에 거주하면서 완성되었다. 『반계수록』은 바로 이 시기에 집필되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자신이 겪었던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깊이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그 폐단을 바로 잡을 방안을 강구하였다. 유형원은 중국의 유교적 고전과 역사 속에서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모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중국의 균전제(均田制)와 부병제(府兵制)를 도입하여 자영농민을 육성함으로써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양반의 특권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과거제를 폐지하고 노비 제도를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유형원의 견해는 생존 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실행도 되지 못했지만, 사후 백여 년이 지나서 1770년(영조 46)에 『반계수록』이 왕명으로 반포되면서 높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 외에도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가져 수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고 전하지만, 불행하게도 『반계수록』 이외에는 서목(書目)만이 전해지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에 있다. 유형원 선생 묘는 1976년 8월 27일 경기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753년(영조 29) 통정대부(通政大夫) 집의(執義)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에 추증되었으며, 1770년(영조 46) 호조 참의(戶曹參議)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찬선(贊善)에 추증되었다. 1793년(정조 17) 이조 참판(吏曹參判)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