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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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弘達 |
영어공식명칭 | Go Hongdal |
이칭/별칭 | 달부(達夫),죽호(竹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575년 - 고홍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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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고홍달 의주까지 선조 호종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고홍달 생원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644년 - 고홍달 사망 |
출생지 | 고홍달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제주(濟州) |
[정의]
조선 후기 부안 출신의 학자.
[가계]
고홍달(高弘達)[1575~1644]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달부(達夫), 호는 죽호(竹湖)이다. 문충공(文忠公) 고경(高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원군(濟原君) 고사렴(高士濂)이고 아버지는 고현(高晛)이다. 부안 지역의 제주 고씨는 16세기 초에 고세호(高世豪)가 처음 부안에 내려오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 뒤 무과 급제자가 14명이나 배출되었고, 봉군(封君)된 자는 4명, 공신으로 책봉된 자는 5명에 이를 만큼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활동 사항]
고홍달은 1575년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1605년(선조 38) 증광 생원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성균관을 그만 두고 문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의병과 군량을 모았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아 여산(礪山)[전라북도 익산시 지역의 옛 지명]까지 올라갔으나 화의(和議)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고를 모아 『양현실기(兩賢實記)』를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전후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