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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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處中 |
영어공식명칭 | Choe Cheoj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정의]
조선 후기 부안 출신의 무신.
[가계]
최처중(崔處中)[?~?]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직제학(直提學) 최광지(崔匡之)의 후손이며,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최응남(崔應南)이다. 최처중의 아들 최양필(崔亮弼)은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거주지가 부안으로 나오며, 아버지 최처중이 훈련원 봉사를 지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활동 사항]
최처중은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교생(校生)으로 있다가 뒤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이 원병(援兵)을 파견하여 후금(後金)을 공격하던 중, 평안도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의 조선군은 1619년(광해군 11) 후금군(後金軍)과 만주 부차령(富車嶺)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최처중은 김경서의 휘하에서 이 부차 전투(富車戰鬪)에 참전했다가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그 뒤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다행히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최처중에 관련된 기사가 1건 실려 있어서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광해군일기』 1617년(광해군 9) 2월 4일조의 기록에 따르면, 부안의 교생 최처중이 호랑이를 부안 땅에서 쏘아 죽였는데, 마침 본현의 수령이 공석 중이어서 호피(虎皮)를 처치하기가 곤란하였다. 최처중은 이를 상부에 알렸는데, 전 고부군수(古阜郡守) 이승형(李升亨)이 상을 타려는 속셈으로 큰 공을 세운 것처럼 과장해서 일을 처리하는 바람에 전라감사 이덕형까지 연루되어 사간원에서 이승형과 이덕형에 대한 처벌이 논의된 일이 있었다. 결국 임금이 도에서 조사하여 상을 준 것이 부당하지 않다고 판결하여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를 통해서 최처중이 무과 급제 전에 교생으로 있었던 점과 무인으로서의 자질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