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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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垓 |
영어공식명칭 | Gim Hae |
이칭/별칭 | 여후(汝厚),퇴우당(退憂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563년 - 김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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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김해 사망 |
출생지 | 김해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묘소|단소 | 김해 묘소 -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
사당|배향지 | 도동서원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부안(扶安) |
대표 관직 | 장악원 주부 |
[정의]
조선 후기 부안 출신의 문신.
[가계]
김해(金垓)[1563~1637]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여후(汝厚),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증이조 참판(贈吏曹參判) 옹천(甕泉) 김석홍(金錫弘)이고, 아버지는 판결사(判決使) 김의복(金義福)이다. 아들로 김이겸(金李謙)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해는 1563년(명종 18)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났다. 김해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천거(薦擧)로 직장(直長)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로 달려가 의주까지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김해는 인조의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그 공으로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에 제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군졸과 군량을 모아 조정에 올려 보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 김이겸으로 하여금 병사와 군량을 모아 군진(軍陣)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후 김해는 벼슬에서 물러나 글을 익히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퇴우당(退憂堂)’이라는 호는 스스로 지었는데 그것은 ‘근심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당시 의주까지 피난 가는 선조의 어가를 호위한 공으로 호성원종일등공신(扈聖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고, 순조 때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있던 도동서원에 추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