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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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生明 |
영어공식명칭 | Choe Saengmyeong |
이칭/별칭 | 옹암(甕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지 | 최생명 출생지 - 전라북도 전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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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옹정서원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경력 | 경시전직(京市殿直) |
[정의]
조선 전기 부안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최생명(崔生明)[?~?]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옹암(甕庵)이다. 아버지는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이다. 아들은 최수손(崔秀孫)이고, 손자로 최순성(崔順成)과 최극성(崔克成)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생명은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다. 소과에 합격한 후 음직(蔭職)으로 관료가 되었다. 그러나 경시전직(京市殿直)을 지내면서 1455년(단종 3) 수양 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본 후, 관직을 버리고 처의 고향인 부안으로 낙향하였다. 언젠가 최생명은 훗날의 사육신(死六臣)과 몇몇 나이 어린 제현(諸賢)에게 시를 지어 보낸 일이 있었는데, 최생명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그를 중국 한(漢)나라의 소광(疏廣)과 소수(疏受)에 빗대었다고 한다. 그만큼 최생명의 시가 훌륭했다는 의미였다. 최생명이 세상을 떠나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최생명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뜻은 굳세고 절개는 깨끗하며, 들어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니 가히 백만세에 걸쳐 제사를 지낼 만하다[志剛節廉 入孝出悌 可祭於社 於百萬世]”라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 있던 옹정서원(甕井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