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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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齊閔 |
영어공식명칭 | Gim Jemin |
이칭/별칭 | 사효(士孝),오봉(鰲峰),충강(忠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순순 |
출생 시기/일시 | 1527년 - 김제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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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김제민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김제민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제민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599년 - 김제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74년 - 김제민 도계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29년 - 김제민 이조 판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854년 - 김제민 충강으로 추시 |
출생지 | 김제민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거주|이주지 | 김제민 이주지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
외가|처가 | 김제민 외가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
부임|활동지 | 김제민 부임지 - 전라북도 순창군 |
묘소|단소 | 김제민 묘소 -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 |
사당|배향지 | 도계서원 -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도계1길 34-13[도계리 464] |
성격 | 문신|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의성(義城) |
대표 관직 | 전라도사 |
[정의]
조선 전기 부안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김제민(金齊閔)[1527~1599]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이다. 할아버지는 김부현(金傅賢)이고, 아버지는 김호(金灝)이며, 어머니는 김석옥(金錫沃)의 딸이다. 부인은 참봉 김윤구의 딸 김해 김씨이다. 아들로는 김엽(金曄), 김흔(金昕), 김안(金晏) 등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제민은 1527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났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3년(선조 6)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사헌부 등의 내직을 거쳤고 화순현감(和順縣監), 순창군수(淳昌郡守), 전라도사를 역임하였다. 김제민의 나이 66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격문을 지어 세 아들을 데리고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으로서 김제민의 활동 무대는 전라도 삼례, 웅치, 장성, 대둔산 아래 충청도 직산, 진위, 북으로는 평안도 중화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였다. 또한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해남 근처로 내려가서 적과 아홉 차례나 싸워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일본군의 육지 상륙을 차단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귀향하여 1599년(선조 32)에 「보방요무(保邦要務) 42조」를 지어 선조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같은 해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정통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전란으로 거의 소실되었고, 현재는 사후 편찬한 『오봉집(鰲峰集)』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74년(현종 15)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도계1길 34-13[도계리 464]에 있는 도계서원(道溪書院)[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79호]에 배향되었으며, 1829년(순조 29)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1854년(철종 5)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