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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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益福 |
영어공식명칭 | Gim Ikbok |
이칭/별칭 | 계응(季膺),금릉(金陵),충경(忠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전기 부안 출신의 문신.
[가계]
김익복(金益福)[1551~1599]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계응(季膺)이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김후손(金後孫)이고, 할아버지는 김석량(金錫良)이며, 아버지는 행창락도 찰방(行昌樂道察訪)[창락도는 경상도 풍기의 창락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임]을 지낸 김광(金光)이다. 부인은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 위로 김진복(金震福), 김승복(金升福)의 두 형이 있었는데, 이 중 김승복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아래로 김태복(金泰福), 김정복(金鼎福), 김이복(金履福)의 세 동생이 있었는데, 이 중 김태복과 김정복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네 명의 생원·진사가 배출된 것이다.
[활동 사항]
김익복은 1551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부인 순흥 안씨를 따라 이사하여 처가인 전라도 남원에서 살았으며, 그의 후손도 전라도 남원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사재당(思齋堂) 안처순(安處順)은 그의 처조부가 된다. 전라도 남원으로 이사한 후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랑(佐郞)과 도사(都事)를 지냈다. 그리고 충청도 연산현[현 충청남도 논산시]으로 이사하여 거기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임계영(任啟英)과 함께 성개(星開)를 지켜 여러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1598년(선조 31)에는 전라관찰사가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천거하자 곧바로 부임하여 전쟁 중에 흩어진 백성을 거두고 성을 지켰다.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예교(曳橋)[현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던 순천왜성]에 있던 적을 쫓아 공격하던 전투에 참여했다가 화살에 맞아 생긴 상처로 인해 1599년에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이조 참판과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금곡사지(金谷祠誌)』에 수록되어 있는 이치대첩 참전자 「배향록(配享錄)」에 ‘충경공금릉(忠景公金陵) 김선생(金先生) 김익복(金益福)’이라고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