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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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安金氏 |
영어공식명칭 | Buan Kimssi|Buan Kim Clan |
이칭/별칭 | 부령 김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원철 |
본관 | 부안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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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부안 김씨 입향지 - 전라북도 부안군 |
세거|집성지 | 부안 김씨 세거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
성씨 시조 | 김알지(金閼智)[원시조]|김일(金鎰)[시조] |
입향 시조 | 김경수(金景修) |
[정의]
김알지를 원시조, 김일을 시조로 하고, 김경수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개설]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부안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뽑힌 사람이 108인이고, 대과(大科)인 문과 급제자가 28인, 무과 급제자가 55명이며, 공신(功臣)으로 녹훈된 사람도 30명에 이른다. 또 학덕(學德)이 높아 서원(書院) 등에 배향된 이가 23명이다.
[연원]
부안 김씨는 서기 65년 금궤에서 나왔다는 김알지(金閼智)를 원시조로 한다. 시조는 김일(金鎰)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김부(金傅)]의 큰아들이다. 김일은 935년(경순왕 9) 부왕이 고려에 귀부하려 하자 반대하였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생을 마쳤다. 그 후 후손들이 고려의 보복이 두려워 산중에 숨어 살다가 고려 선종(宣宗) 때 김경수(金景修)가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를 지내며 세상으로 나왔다.
[입향 경위]
부안 입향조인 김경수의 아들 김춘(金春)이 부령 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군되자 부령(扶寧)을 관향으로 하였으나 1416년(태종 16) 부령현(扶寧縣)이 보안현(保安縣)과 합쳐져 부안현(扶安縣)이 되자 부안 김씨로 부르게 되었다. 1675년(숙종 1)쯤 김홍원(金弘遠)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할아버지에게 우동리 일원의 토지와 집 등을 매입하였고, 이후 김홍원의 손자 김반(金磻)이 가족과 함께 줄포에서 현재 우동마을 일원으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인물]
부안 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1211~1278]이다. 김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성(尙書省) 우복야(右僕射)를 지낸 김의(金宜)의 아들로 고려 고종(高宗) 때인 12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22세에 문과에 합격한 후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다. 몽고(蒙古)의 지배 하에서 무리한 요구와 핍박이 심했던 시절 외교를 맡아 뛰어난 지략과 문장력으로 국란을 극복한 정략가였다. 문장력이 뛰어났고 몽고어도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하였다고 전한다. 호는 지포(止浦)이고, 문집(文集)으로 『지포집(止浦集)』 6권이 전한다. 말년에 부안읍 선은동[현 부안읍 선은리]에 살면서 변산의 지지포(止知浦)를 오가며 말년을 보냈다.
김구의 네 아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큰아들 충선공(忠宣公) 김여우(金汝盂)는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가 상서공(尙書公) 김각(金恪)과 둘째 아들 이부상서(吏部尙書) 좌승지공(左承旨公) 김식(金軾)이다. 좌승지공은 좌승지공파로 분파되었다. 상서공의 손자 대제학공(大提學公)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중장랑공(中郎將公) 김인정(金仁鼎)이며, 둘째는 시승공(侍承公) 김용수(金龍壽)이다. 시승공은 시승공파로 분파되었다.
대제학공 큰아들 김신정(金信鼎)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봉정대부(奉正大夫) 한성소윤(漢城少尹) 김세영(金世英)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분파하여 그 후손이 종사랑공파, 장사랑공파, 진사공파, 승의랑공파 등 4개 파로 분파되었다. 둘째 아들 고부군사(古阜郡事) 김광서(金光叙)는 군사공파로 분파하여 그 후손은 시직공파(侍直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등 5개 파로 분파되었다. 셋째 아들 전의소감(典儀少監) 김광신(金光信)은 소감공파(少監公派)로 분파되고, 넷째 아들 보승낭장(保勝郞將) 김광구(金光矩)는 낭장공파(郞將公派)로 분파되었다. 부안 김씨는 현재 13개 대파(大派)와 그 밑에 53개 소파(小派)로 나누어져 전국 각지에서 살고 있다.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석동산(席洞山)은 대부분 부안 김씨의 선산으로 조상들을 모신 수많은 묘가 비석과 함께 숲을 이룬다. 또한 시제(時祭)를 모시는 제각(祭閣)이 다섯 곳인데, 대표적인 제각이 군사공파의 파조인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를 제향하는 취성재(聚星齋)이다. 바로 옆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은 김직손(金直孫)의 신도 비문(神道碑文)을 안치한 비각(碑閣) 등이 있어 취성재는 호남 제1의 제각이라는 평을 받는다.
부안 김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4년(선조 17) 『만력갑신보(萬曆甲申譜)』라는 족보를 발간하였다. 82쪽 4단으로 된 목판본으로 우리나라 첫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成化譜)』보다 108년 후에 간행되었지만 초기의 몇 안 되는 족보 중 하나이다. 이로 보아 부안 김씨 가문은 씨족 문화가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 초기의 족보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황]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부안군에는 부안 김씨 1,103명이 살고 있다. 현재는 성씨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 집성촌(集姓村) 형태가 거의 사라지고 있지만 급속하게 산업화 사회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집성촌이 많았고, 부안에서는 대부분이 부안 김씨 집성 마을이었다. 부안읍의 옹정(瓮井)마을을 중심으로 내요리, 모산리, 명당리와 동진면의 익상리, 신흥리, 행안면의 솔메, 행산, 주산면의 돈계리, 화정리, 상서면의 우덕동, 감교리, 통정리, 보안면 상하입석 마을과 우동리 등이 대표적인 부안 김씨 집성촌이었다. 부안 김씨는 전라북도 전주와 남원, 전라남도 나주에도 일부 집성을 이루고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지포[김구] 선생 유허비는 부안읍 선은리 579-1번지에 있으며, 김구의 묘소와 경지재, 신도 비문과 비각이 부안군 변산면 운산로 169-120[운산리 3번지] 일원에 있다.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일원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취성재 및 김직손 신도비는 부안군 부안읍 석동길 37[연곡리 358번지] 일원에 있다.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산36-1번지에 있던 도동서원에서는 김구, 김여우 등을 배향하였으나 훼철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김횡과 김명, 김택삼이 배향된 유천서원은 부안군 보안면 영전길 89-38[영전리 212-3번지]에 있다. 그 외 많은 재각과 묘소 등이 부안 지역에 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