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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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億鎰純孝碑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산2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만오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44년 - 김억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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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04년 - 김억일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04년 - 김억일 순효비 건립 |
이전 시기/일시 | 광해군 대 - 김억일 순효비 철거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828년 - 김억일 순효비 재건 |
현 소재지 | 김억일 순효비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산27 |
성격 | 효행비 |
관련 인물 | 김억일(金億鎰)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37㎝[높이]|52㎝[너비]|21㎝[두께] |
소유자 | 부안 김씨 |
관리자 | 부안 김씨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있는 김억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604년에 세운 비.
[개설]
김억일(金億鎰)[1544~1604]의 본관은 부안, 자는 중임(重任),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김영무(金英武)이다. 1544년(중종 39) 부안 옹정(瓮井)에서 출생하였다. 1587년(선조 20)에 효자로 천거되어 장악원 주부에 제수되었고, 뒤에 사직(司直)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억일은 수십 명의 가동(家僮)과 수십 석의 군량미를 내놓았고, 직접 의병을 이끌고 직산(稷山)까지 이르러 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되어 3년 뒤에 해배되었다. 1874년(고종 11) 11월 조정으로부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김억일의 위패는 장성(長城) 오산사(鰲山祠)에 모셔져 있다.
[건립 경위]
김억일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선조는 그의 순효비를 세워주도록 하였다. 조정에서 김억일에게 순효비를 세워주고, 김억일의 이름을 『삼강행록(三綱行錄)』에 올리도록 한 것이 1604년(선조 37)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김억일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일로 광해군은 김억일의 순효비를 철거하고 그의 이름도 『삼강행록』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이후 1623년(광해군 15)에 김억일은 신원되었는데, 김억일 순효비(金億鎰純孝碑)가 다시 세워진 때는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1828년(순조 28)이었다.
[위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있는 취성재(聚星齋)에서 남서쪽으로 10m 정도 떨어져 있다.
[형태]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둘렀다. 담장 안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정려각이 있다. 김억일 순효비는 정려각 안에 세워져 있다. 정려각의 높이는 200㎝이다. 비신은 높이 137㎝, 너비 52㎝, 두께 21㎝이다.
[금석문]
앞면에 ‘증통정대부 이조 참의 행통훈대부 장악원 주부 김공 억일지순효비(贈通政大夫吏曹參議行通訓大夫掌樂院主簿金公億鎰之純孝碑)’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