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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21
한자 崔秉麟孝行碑
이칭/별칭 대사간 백강 전주 최공 효행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209-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14년 5월 29일 - 최병린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96년 10월 30일 - 최병린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74년 4월연표보기 - 최병린 효행비 건립
현 소재지 최병린 효행비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209-2지도보기
성격 효행비
양식 비석
관련 인물 최병린(崔秉麟)|이병관(李炳觀)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48㎝[높이]|51.5㎝[너비]|23㎝[두께]
소유자 전주 최씨
관리자 전주 최씨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최병린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비.

[건립 경위]

최병린(崔秉麟)[1814~1896]의 본관은 전주, 자는 성재(聖在), 호는 백강(白岡)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소학(小學)』의 가르침대로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부모의 병이 위중하였을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며칠간 목숨을 연명케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절을 하는 등 예법을 따랐으며, 제사를 모실 때에도 생전과 똑같이 정성껏 봉양하였다. 최병린의 효심에 감동한 전라감사 심상학(沈相學)이 1897년(고종 34)에 최병린을 사헌부 감찰로 천거하였으며, 규장각 부제학 이병관(李炳觀)이 비석의 글을 지었다. 뒤에 다시 전라감사 이성렬(李聖烈)과 군수 심희수(沈熙洙)의 천거로 대사간(大司諫)에 증직되었다. 1974년 4월에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을 기리기 위하여 최병린 효행비(崔秉麟孝行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209-2에 있다. 부안군 백산면 동학로 207 주택 앞 용계리 버스 승강장에서 북쪽으로 100m가량 떨어져 있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백산 삼거리를 거쳐 백룡 정미소를 막 지난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동학로를 따라 1㎞쯤 가다 보면 도로 바로 왼편, 논의 한 모퉁이에 최병린 효행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비신은 오석을 사용하였고, 위에 가첨석을 얹었다. 비석은 높이 148㎝, 너비 51.5㎝, 두께 23㎝이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 ‘대사간 백강 전주 최공 효행비(大司諫白岡全州崔公孝行碑)’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신사범(愼思範)이 지은 최병린의 효행 사적이 실려 있다. 신사범(愼思範)이 글을 짓고, 남대희(南大熙)가 글씨를 썼다. 비석에는 최병린의 효행 사적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현황]

비석은 1974년에 세운 것이어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원래의 정려비가 세워져 있었던 자리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이후의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효자와 열녀들에 대한 정려 발급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고종 연간에 정부에서 허가한 정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남발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충효열에 대한 정부의 포상책이 빈곤한 재정을 메우기 위한 보충 수단으로 전락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또한 이를 가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금전을 동원해서라도 정부로부터 정려를 받아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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