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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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國鎬妻扶寧金氏旌閭 |
이칭/별칭 | 부령 김씨 정려비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산17-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경성 |
건립 시기/일시 | 1919년 - 오국호 처 부령 김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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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오국호 처 부령 김씨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산17-2 |
성격 | 효열비 |
양식 | 석정려 |
관련 인물 | 오국호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75㎝[가로]|45㎝[세로] |
소유자 | 해주 오씨 |
관리자 | 해주 오씨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에 있는 오국호의 처 부령 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919년에 세운 정려.
[개설]
오국호(吳國鎬)[1849~1877]의 본관은 해주이며, 초명은 오국영(吳國泳), 자는 국현(國賢)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오언종(吳彦宗)이고, 할아버지는 오치형(吳致炯)이며, 아버지는 오익호(吳翼鎬)이다. 부령 김씨는 오국호의 부인으로 아버지는 김수옥(金秀玉)이다.
[건립 경위]
부령 김씨(扶寧金氏)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성품으로 성장하였다. 시집온 후 시부모를 극진한 효성으로 모시며 살았는데, 시어머니가 병환을 얻어 위급해졌다. 이에 세 번이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였으나 효력이 없어, 다시 열지주혈(裂指注血)을 하며 10여 년 동안 수명을 연장하게 하였다. 그 다음 해 큰 흉년을 맞아 바느질과 길쌈, 품팔이를 해서 시부모를 모시고 본인은 잡곡과 피를 갈아 죽으로 연명하였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나물을 캐서 먹고 땔나무를 하여 생계를 유지했는데 시어머니가 괴질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부령 김씨는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에 5일간 음식을 전폐하고 상을 치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오국호가 객지에서 갑자기 죽음을 당함에 감당하기 어려운 원통한 마음을 안고 정성을 다하여 상을 치렀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지 7일 후에 시아버지 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극에 다달아 식음을 전폐하고 복상(服喪)을 하는 중에 코와 입에서 피가 나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주변 사람들이 억지로 음식을 먹여 한나절 반만에 깨어나 경황 중에 상을 치렀다. 그 후 아들 오해욱(吳海旭)[1872~1929]이 장성하여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하여 회갑연을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준비한 음식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많은 사람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칭송하였다. 오국호 처 부령 김씨 정려(吳國鎬妻扶寧金氏旌閭)는 이러한 부령 김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1919년에 건립되었다.
[위치]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부안교육지원청 사거리에서 행안면 진동리 행안초등학교 방면으로 1㎞ 정도 직진하면 좌측에 왕가산[행안산]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다. 입구에서 왕가산 등산로를 따라 170m를 가면 우측 주택 옆에 오국호 처 부령 김씨 정려가 있다.
[형태]
주위는 벽돌로 담장을 두르고, 담장 위로 철제 난간을 둘렀다. 바닥은 콘크리트로 처리하였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석현판을 끼웠다. 기둥과 현판 위에는 지붕 모양의 개석이 있다. 석현판의 크기는 가로 75㎝, 세로 45㎝이다. 석정려 앞에는 1919년 초여름 최병심(崔秉心)이 쓴 부령 김씨의 효행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88㎝, 너비 34㎝, 두께 10㎝이다.
[금석문]
석현판 전면에 ‘학생해주오국호지처효열부부령김씨지려(學生海州吳國鎬之妻孝烈婦扶寧金氏之閭)’라 쓰여 있고 ‘상황십년계유시월 일 효부명정 상황 이십사년 정해 구월 일 명정(上皇十年癸酉十月 日 孝婦命旌 上皇 二十四年 丁亥 九月 日 命旌)’이라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