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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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致順旌閭 |
이칭/별칭 | 홍치순 효자 정려,남양 홍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 38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경성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20년 - 홍치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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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89년 - 홍치순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14년 - 홍치순 정려 건립 |
현 소재지 | 홍치순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 383 |
성격 | 정려비 |
양식 | 석정려 |
관련 인물 | 홍치순(洪致順)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석판: 81㎝[가로]|37㎝[세로]|정려기 번역비: 102㎝[높이]|44㎝[너비]|19㎝[두께] |
소유자 | 남양 홍씨 |
관리자 | 남양 홍씨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에 있는 홍치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14년에 세운 정려비.
[개설]
홍치순(洪致順)[1820~1889]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당홍계(唐洪系)이다. 자는 기삼(耆三), 호는 삼강(三崗)이다. 남양 홍씨 세보에는 홍치순의 이름이 ‘홍순한(洪淳翰)’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태사(高麗太師) 홍은열(洪殷悅)이 시조요, 중조(中祖) 홍경림(洪景霖)은 정국훈(靖國勳)으로 익원군(益原君)에 봉군되었다. 할아버지는 사복시 정에 증직된 홍재달(洪在達)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로 증직된 홍종길(洪鍾吉)이다. 홍치순은 1820년(순조 20)에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다.
[건립 경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정려기(旌閭記)에 의하면, 홍치순은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서, 부모를 봉양함에는 저녁과 새벽에 덥고 서늘함에 맞추었다고 한다. 부모가 병환이 나면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으며, 저녁에는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예문(禮文)을 넘어서 상(喪)을 치렀으며, 상을 치르고는 묘 옆에 여막(廬幕)을 치고 3년 간 시묘(侍墓)살이를 다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도 날마다 무덤을 살폈는데 늙도록 한번도 빼어 본 적이 없었다.
1889년(고종 26)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는데 임종 시에 자손에 유서를 남기어 훈계하기를 “아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를 하여야 하며, 신하는 마땅히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하며, 처세는 마땅히 부드럽게 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따뜻하게 해야 하며, 제사를 받들 때에는 조촐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홍치순은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고을에서 조정에 추천을 올리니 조정에서는 1892년(고종 29)에 정려를 명하고 호조 참판에 증직하였다. 이후 23년 뒤인 1914년에 아들 홍낙표(洪樂杓)가 다시 사적을 기록하고자 왕명을 따라 지금의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에 홍치순 정려를 건립하였다.
[위치]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동진초등학교 삼거리에서 동진면 안성리 문포 방면으로 직진한다. 동진 협동 미곡 처리장을 지나 사거리에서 순환북로를 따라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우측에 ‘남양 홍씨 세천(南陽洪氏世仟)’이라는 비석이 나온다. 비석을 끼고 우회전하면 남양 홍씨 재실이 나오는데, 재실 동쪽에 홍치순 정려가 있다.
[형태]
홍치순 정려는 돌로 만들어 세웠다. 석판의 크기는 가로 81㎝, 세로 37㎝이며, 정려기 번역비는 높이 102㎝, 너비 44㎝, 두께 19㎝이다.
[금석문]
석판 앞면에는 ‘효자 가선대부 호조 참판 송공 치순지려(孝子 嘉善大夫戶曹參判洪致淳之閭) 상지 이십구 년 임진 명정(上之二十九年壬辰命旌)’이라 되어 있고, 뒷면에는 ‘효자 삼강 홍공 정려기(孝子三岡洪公旌閭記)’라 쓰여 있다. 석판은 1914년 기우만(奇宇萬)이 글을 지었다. 현판 아래의 비석은 현판 뒷면에 있는 ‘효자 삼강 홍공 정려기’의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문은 1997년 이인기(李寅器)가 번역하여 쓰고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