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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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元秀旌閭 |
이칭/별칭 | 전주 이씨 이원수 정려각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모산리 51-2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경성 |
건립 시기/일시 | 1873년 - 이원수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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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0년 9월 - 이원수 정려 중수 |
현 소재지 | 이원수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모산리 51-21 |
성격 | 정려각 |
양식 | 겹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전주 이씨 문중 |
관리자 | 전주 이씨 문중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모산리에 있는 개항기 정려각.
[개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충효 사상과 정절을 으뜸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하여, 충효열(忠孝烈)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려(旌閭)를 내려 백성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정려의 종류에는 정려비와 정려문, 정려각 등이 있다. 이원수 정려(李元秀旌閭)는 개항기에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원수(李元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원수의 본관은 전주이며,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인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15세손이다. 이원수는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원수는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야산에서 시묘를 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호랑이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효심이 지극하였으면 들짐승까지 도움을 주었을까 하고 이를 가상히 여긴 부안 현감이 조정에 정각을 세워 달라고 상소하였고, 조정에서 자재를 공급해 주어 1873년(고종 10)에 정려를 세웠다.
[위치]
이원수 정려는 부안군 부안읍 신덕길 4[모산리 신덕마을] 앞 길가에 있다. 부안군 부안읍에서 백산면 소재지 방향으로 지방도 제705호선을 따라 직진하여 부안 종합 사회 복지관을 지나면 로터리가 나온다. 로타리에서 부안군 백산면 소재지 방면으로 1.3㎞ 정도 가서 좌측으로 신덕·신정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700m 정도 가면 신덕리 마을 도로변 좌측에 정려각이 있다.
[변천]
이원수 정려는 1873년에 세웠다. 정려 비각 안에 이원수의 ‘효자실행록서(孝子實行錄序)’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에는 이원수의 효행에 관한 내용과 1870년(고종 7)에 예조에서 복계(復啓)하여 1873년에 정려를 세웠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증조고정려중수기(曾祖考旌閭重修記)’ 현판이 걸려 있는데, 1960년 9월에 정려각을 중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형태]
정려각은 도로변에 있는데, 도로 쪽으로 양면은 돌로 담장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으나 도로와 인접하지 않은 곳은 담장을 만들지 않았다. 담장 안쪽에 정려각이 있다.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길이는 각 220㎝와 190㎝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기초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올렸다. 정려각 안에는 정려비가 있다. 정려비에는 ‘효자전주이공원수지려(孝子全州李公元秀之閭)’라고 써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87㎝, 폭 32㎝, 두께 15㎝이다. 비석은 화강암의 사각형 기단 위에 비신을 올리고 개석을 올렸다. 비석 위쪽에 이승보(李承輔)가 쓴 ‘효자실행록서’ 현판과 1961년에 이기복(李記福)이 쓴 ‘증조고정려중수기’ 현판 2개가 있다. 비각은 3면을 자연석으로 담장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