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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00
한자 驪陽陳氏三孝閭
이칭/별칭 여양 진씨 세효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799-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경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65년 8월 17일연표보기 - 여양 진씨 삼효려 건립
현 소재지 여양 진씨 삼효려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799-1지도보기
성격 효자 정려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여양 진씨 문중
관리자 여양 진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 있는 개항기 효자 정려.

[개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충효 사상과 정절을 으뜸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하여, 충효열(忠孝烈)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려(旌閭)를 내려 백성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정려의 종류에는 정려비와 정려문, 정려각 등이 있다. 여양 진씨 삼효려(驪陽陳氏三孝閭)는 개항기에 여양 진씨(驪陽陳氏) 진우방(陳佑邦)과 진득서(陳得瑞), 진윤태(陳允泰)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진우방의 본관은 여양, 자(字)는 군경(君卿), 호는 풍암(楓庵)이다. 1717년(숙종 43)에 진후강(陳後綱)과 강릉 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를 살았다. 어느 날 실수로 움막에 불이 났는데, 느닷없이 소낙비가 쏟아져 불이 꺼졌고 아버지의 무덤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한다. 진우방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이 도운 것이라 하여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除授)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1777년(정조 1)에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內蓼里) 원석제마을 동쪽 산기슭에 있다.

진득서의 자(字)는 운서(雲瑞), 호는 풍계(風溪)이다. 1748년(영조 24)에 진우계(陳佑季)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진우방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강개지기(慷慨志氣)하였고, 아버지와 같이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병환 때는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서 간호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움막을 치고 시묘를 하였는데,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근처의 풀이 눈물에 젖어 자라지 못하고 죽었으며, 겨울에는 눈이 내려도 무덤에는 쌓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정에서 진득서의 효행을 듣고 동몽교관에 제수하고 정려를 내렸다. 1822년(순조 22)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실상사(實相寺) 안산(案山) 실이봉(實而峯) 동암(動巖) 앞에 있으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진윤태의 자는 선지(善之), 호는 인제(忍齊)이다. 진득서의 손자로 진경화(陳敬華)와 진주 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1816년(순조 16)에 태어났다. 진윤태 또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서 수명을 3일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해서는 할아버지 진득서와 증조할아버지 진우방의 효행을 본받아 슬픔을 다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효자 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1877년(고종 14)에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부안군 부안읍 신흥리 도방산 가운데에 있다.

1863년(철종 14)에 도승지(都承旨) 민치상(閔致庠)이 정려를 내릴 것을 계문(啓聞)하였고, 이조 판서 홍종응(洪鐘應)이 복계(復啓)하였다. 1865년(고종 2) 8월 17일 3대에게 동몽교관 조봉대부를 증직하였고,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 석제(石堤)마을 뒤편에 진우방과 그 아들 진득서, 그리고 증손자 진윤태의 효행을 기리는 3세 ‘세효 정려(世孝旌閭)’를 세웠다. 영의정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이 근서(謹序)한 편액과 예조 판서 안동 김응균(金應均)이 근기(謹記)한 편액이 있다. ‘삼효려(三孝閭)’ 현판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

[위치]

여양 진씨 삼효려는 부안군 부안읍 돌모산로 158[내요리 석제마을] 북쪽에 있다. 부안군 부안읍에서 지방도 제707호선을 따라 주산면 소재지로 가다가, 부안남초등학교를 지나 로터리에서 직진하면 신흥 상회 앞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돌모산로를 따라가면 내요 보건 진료소가 보이는데, 내요 보건 진료소를 지나면 ‘돌모산’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다. 비석을 따라 직진하면 좌측에 주야간 복지 센터가 있고, 복지 센터를 끼고 좌회전하여 계속 가면 막다른 삼거리 골목길이 나온다. 삼거리 골목길에서 좌회전하여 30여 m 직진하면 우측 모퉁이에 정려각이 있다.

[변천]

여양 진씨 삼효려는 1865년 8월 17일에 건립하였다.

[형태]

벽돌로 만든 담장을 두르고, 담장 안에 정려각을 두었다.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기는 정면 3칸이 각 157㎝, 150㎝, 155㎝이며 측면은 1칸 242㎝이다. 기둥은 화강석을 다듬은 기초석 위에 원형의 나무 기둥을 얹었다. 출입문이 3개로 되어 있으며, 출입문에는 ‘삼효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진우방지려 상지이년 을축 팔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陳佑邦之閭上之二年乙丑八月日命旌)’,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진득서지려 상지이년 을축 팔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陳得瑞之閭上之二年乙丑八月日命旌)’,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진윤태지려 상지이년 을축 팔월 일 명정(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陳允泰之閭上之二年乙丑八月日命旌)’이라 써 있는 3개의 정려가 걸려 있다. 이외에 예조 판서 김성균(金性均)과 조두순이 각각 쓴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현황]

여양 진씨 삼효려여양 진씨 문중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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