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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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靜思庵址 |
이칭/별칭 | 우동리 정사암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39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철 |
건립 시기/일시 | 15~16세기 - 정사암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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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정사암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39 |
성격 | 절터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조선 시대 절터.
[개설]
정사암지(靜思庵址)는 조선 시대에 창건한 절로 알려진 정사암이라는 암자 터이다. 절터에는 조선 시대 기와편이 산재되어 있으며, 주춧돌 등이 확인된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6권 문부(文部) 3, 기(記)에 「정사암 중수기(靜思庵重修記)」가 실려 있다. 그 번역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안현(扶安縣) 해안에 변산(邊山)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愚磻)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府使) 김청(金淸)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 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란 곳에 집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進士) 김등(金登)이란 이가, “우리 선군(先君)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군 달부(高君達夫) 및 두 이씨(李氏)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 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 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안 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의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 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散髮)하고 옷을 풀어헤친 채 못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살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굽어보고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어서 마치 안기생(安期生)·선문자(羨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고을원인 심덕현(沈德顯)이 암자가 피폐하되 보호하는 이가 없음을 보고,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더해 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역(官役)을 바꾸어 거기에 머물러 지킬 것을 책임지웠다. 암자는 이로 말미암아 복구되었다 한다.
[변천]
정사암지에서는 기와편, 백자편, 옹기편 등이 수습되는데 기와편의 등 문양은 청해파문(靑海波紋)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정사암의 조성 시기는 15~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위치]
영전-곰소 간 국도 30호선 변에 위치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우신마을에서 바드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턱에서 남대봉으로 오르는 산길로 300m 정도 가면 선계사지(仙溪寺址)가 자리하고 있다. 선계사지 남단에는 기암절벽을 이룬 선계 폭포가 있으며 이곳 암반을 따라 동쪽으로 40m 정도 올라가면 절벽을 이룬 편평한 암반이 자리하는데 정사암지는 이 암반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현황]
정사암지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절터 뒤편은 암벽으로 둘러져 있다. 암벽은 건물의 지붕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암벽 아래에는 우물이 자리하고 남쪽 끝부분에는 축대가 쌓여 있다. 정사암지는 현재 약초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규모는 동서 27m, 남북 18m 내외이다. 절터 내에는 편평하게 다듬어진 2매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