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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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安核廢棄場反對運動 |
영어공식명칭 | Opposition Movement Against Buan Nuclear Disposal Site |
이칭/별칭 | 부안 방폐장 반대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철 |
발단 시기/일시 | 2003년 7월 12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부안 군수 핵 폐기장 유치 결정 기자 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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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2003년 7월 14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김종규 부안 군수 산업자원부에 핵 폐기장 유치 신청서 제출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7월 22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핵 폐기장 백지화 및 군수 퇴진 결의 대회 개최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7월 24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산업자원부 방폐물 처리장 부지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최종 확정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7월 30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상경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7월 31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해상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8월 13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서해안 고속 도로 점거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8월 25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청소년 등교 거부 투쟁 |
전개 시기/일시 | 2003년 9월 3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상경 투쟁 |
종결 시기/일시 | 2004년 2월 14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원전 수거물 관리 시설 건립에 대한 부안 군민 찬반 투표 실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9월 16일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산업자원부 부지 선정 절차 포기에 들어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11월 -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 부안 방폐장 건립 백지화 |
발생|시작 장소 | 핵 폐기장 유치 장소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치도리 깊은금 |
종결 장소 | 2·14 주민 투표 장소 - 전라북도 부안군의 각급 학교 |
성격 | 주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산업자원부|부안군 의회|김종규 |
[정의]
2003년 7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전라북도 부안 군민들이 벌인 핵 폐기장 설치 반대 운동.
[개설]
2003년 7월 14일에 전라북도 부안 군수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 핵폐기물의 처리·관리 시설인 핵 폐기장[방폐장]의 부안군 위도 유치를 신청했고, 부안에서는 핵 폐기장 건설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충돌하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2003년 7월 24일에 산업자원부가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 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어 전라북도 부안군의 위도면을 핵 폐기장 부지로 최종 확정하였다.
전라북도 부안군 주민들은 ‘핵폐기장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위도면의 방폐장 건설을 막기 위해 항쟁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주민들 상당수가 부상을 당했으며 사법 처리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2004년 2월 14일 방폐장 건립에 대한 부안 군민의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는 반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은 91%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법적 효력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었지만, 위도 핵 폐기장 건립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2004년 9월 16일 산업자원부가 부지 선정 절차 포기에 들어갔고, 같은 해 11월 부안 핵 폐기장 건립은 결국 백지화되었다.
[역사적 배경]
핵 폐기장은 원자력 이용 시 발생하는 방사성 폐기물[핵폐기물]을 영구 처분하기 위한 시설이다. 국내의 핵폐기물은 그동안 각 원자력 발전소의 임시 저장고에 저장해 왔는데, 이 저장고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핵폐기물 처분장인 핵 폐기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핵 폐기장은 근처에 항만 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곳이면서 지하에 빈 동굴을 설치하기 용이한 암반으로 구성된 곳에 건설해야 한다.
정부는 핵 폐기장 마련을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부지 선정을 추진해왔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에는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려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1994년~1995년에는 경기도 옹진군 덕적도[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덕적도]에 건설하려다 실패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전라북도 부안 군수가 유치 신청을 했지만, 의사 결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배제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2003년 5월 9일 위도 주민 80여 명이 대전 원자력환경기술연구원을 견학했고, 11일에는 ‘위도 주민 핵 폐기장 유치 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치 서명을 받기 시작하였다. 13일에는 위도대책위가 주민 80% 이상의 서명을 받아 부안군 의회에 핵 폐기장 유치를 청원하였다. 위도 주민들이 핵 폐기장 유치에 찬성한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계화도 간척 사업이나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인해 물길이 바뀌고 바다 속에 토사가 쌓이면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다음으로 전라남도 영광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온배수로 인해 바다 수온이 높아지면서 고기들이 연근해를 떠났다. 마지막은 이런 피해를 받으면서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이와 함께 핵 폐기장 건설을 유치하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위도 주민 개개인에게 마치 보상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호도한 왜곡된 정보도 주민들의 찬성에 한 몫을 했다.
전라북도 부안 군수는 그동안 핵 폐기장 유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7월 11일에 기자 회견을 열어 핵 폐기장 유치 선언을 했고, 부안군 의회에서는 위도 주민의 핵 폐기장 유치 청원을 7:5로 부결시켰다. 34개 단체가 참여한 핵폐기장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도 군수 입장에 반대하며 원천무효를 주장했으나, 군수는 이런 주민들의 요구를 뒤로하고 7월 14일 산업자원부에 핵 폐기장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3,000여 명의 부안 군민들이 핵 폐기장 반대 2차 궐기 대회를 열었고, 부안군 의회에서는 핵 폐기장 유치에 찬성하는 부안군 의회장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군수 사퇴 권고안을 8:4로 표결하였다.
당시 핵 폐기장의 위도 유치에 대한 부안 주민들의 의견은 찬반으로 나뉘었다. 찬성자들은 부안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반대자들은 방사성 물질이 유입되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우려하였다. 특히 위험성과 환경의 어려움을 들어 관광 부안이 입을 수 있는 이미지 타격을 우려하기도 했다. 당시 핵 폐기장 예정 지역이었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치도리 깊은금을 답사한 사람들은 위도에서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구덩이에다 핵 폐기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지역에서는 지진에 취약한 활성 단층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7월 18일에 국무총리 주재로 원전 수거물 관리 센터 관련 관계 장관 회의를 열어 핵 폐기장 유치 신청자인 전라북도 부안군과 위도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위해 「위도 특별법」을 제정하고 ‘위도 종합 개발 기본 계획’도 수립하기로 하였다. 환경 단체에서 “핵 폐기장을 건설하기로 한 위도는 2001년에 인근 해역에서만 지진이 세 차례나 발생할 정도로 잦아 부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7월 24일에는 산업자원부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 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어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를 방폐물 처리장 부지로 최종 확정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군민들은 핵 폐기장 백지화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정부 투쟁을 벌였다. 7월 22일에는 1만 명이 모여 핵 폐기장 백지화와 군수 퇴진 결의 대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이 중 50여 명이 중상이었다. 전라북도 부안 주민들은 상경 시위와 해상 시위, 서해안 고속 도로 점거, 학생들의 등교 거부 등을 통해 투쟁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주민들 상당수가 부상을 당했으며 사법 처리가 된 사람들도 390여 명이 되었다. 2003년 10월 3일 고건(髙建) 국무총리와 부안 대책위가 대화 기구 설립에 합의하고 협상했으나 실질적 효과는 없었고, 연내 주민 투표 실시에 대해서 정부가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대화는 중단되었다.
전라북도 부안 주민들은 오후 2시만 되면 수협 앞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고, 저녁에는 촛불 시위로 이어갔다. 촛불 시위는 날씨와 상관없이 한 겨울에도 진행되었다. 이후 ‘부안 핵 폐기장 주민 투표 중재단’이 구성되어 정부와 주민, 두 당사자의 입장을 중재하여 제시한 2004년 초 주민 투표 실시 방안을 양측이 받아들임으로써 부안 사태가 진정되었다. 2004년 2월 14일 원전 수거물 관리 시설 건립에 대한 부안 군민의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고, 투표 결과는 투표율 72.01%에 반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은 91.83%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비록 법적 효력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었지만, 위도 핵 폐기장 건립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과]
전라북도 부안 주민들의 계속되는 시위로 인해 핵 폐기장의 전라북도 부안 지역 건설 계획은 중단되었다. 2004년 9월 16일 산자부가 부지 선정 절차 포기에 들어갔고, 같은 해 11월 부안 핵 폐기장 건립이 결국 백지화되었다. 전라북도 부안군의 핵 폐기장 유치 신청 당시에는 사용 후 핵연료와 중저준위(中低準位) 방사성 폐기물을 분리하는 법조차 없었다. 그러나 2005년 6월을 기점으로 방사성 폐기물의 분리 처리, 유치 지역에 대한 지원 강화, 유치 신청 시 주민 투표 등을 담은 선정 절차를 공고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부안 사회의 갈등 상황은 정부의 핵에너지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핵 폐기장 후보지 선정 과정을 둘러싼 지역 주민들 간의 갈등 속에서 부안 사회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라북도 부안 핵 폐기장 유치 문제는 개발에서 소외되던 한 지역 사회가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주민들의 의사가 찬반으로 갈리는 갈등 속에서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라북도 부안 주민들이 핵 폐기장 문제를 대하게 되면서 자연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이런 점은 부안 핵 폐기장 유치 문제가 가져다 준 긍정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