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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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選擧 |
영어공식명칭 | May 10th General Election |
이칭/별칭 | 제헌 의회 선거,5·10 총선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철 |
[정의]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 국회 의원 선거의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 선거.
[개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 문제 처리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결국 한국의 분단으로 귀결되면서, 1948년 유엔의 결의에 따라 5·10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5·10 총선거는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 남한 지역에서만 실시된 선거였고, 전체 의석 200석 중 4·3 항쟁이 진행 중이던 제주도 2개 구를 제외한 198개 구에서 198명의 제헌 국회 의원이 선출되었다. 제헌 국회는 정부 수립 기초를 다지는 임무를 맡은 국회로서 국회 의원의 임기가 2년이었다.
[역사적 배경]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의에 따라 신탁 통치를 포함한 한국 문제 토의를 위해 설치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미·소의 대립과 함께 1947년 8월 12일에 완전 결렬되었다. 이어 한국의 독립 문제는 미국에 의해 유엔[국제 연합] 총회의 정식 의제로 상정되었다. 유엔 총회에서, 미국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 및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 동시 철수를 주장했고, 소련은 미소 양군 철수 후 조선인의 손에 의한 조선의 장래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미국 측 의견이 다수결로 채택됨으로써 5개년 신탁 통치안은 사라지고, 한국 문제는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9개국 대표로 총선거 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소련 군정 당국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입국을 거절했고, 유엔 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만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경과]
1. 총선거에 대한 각 당과 사회단체의 입장
이승만(李承晩)과 한국민주당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당 계열은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와 남북 요인의 협상에 의한 총선거를 주장했다. 좌익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과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결사반대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파견되었지만 북한에서는 입북을 거부했고, 유엔 소총회에서는 1948년 2월에 한국의 가능한 지역에 한해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했다. 이에 남로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김규식(金奎植)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중도파 세력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조직하여 반대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도 제주도의 4·3 항쟁을 비롯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2. 전라북도 부안의 총선거
전라북도 부안의 좌익 세력은 1947년의 3·22 투쟁 등을 거치면서 조직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찰의 예비 검속이나 반공청년단들의 감시에 의해 효과적인 활동을 못했고, 김진영, 손윤규, 허영철이 검거되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지하로 숨어 들었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전국 인구의 80% 가까운 사람들이 문맹자인 상황이다 보니 문맹 퇴치 사업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부안초등학교에서는 8개 교실을 개방하고 학교 교사들이 직접 한글 교육을 담당하여 지도에 나섰다. 한글 교습의 실시 기간은 약 1개월이었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각 마을 이장·반장들의 출석 독려 요구에 못 이겨 나올 뿐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전라북도 부안군청의 국민회의는 노인들의 한글 해독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한글 야간 학교를 폐쇄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당시 48개 정당 또는 사회단체 중에서 7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김구·김규식이 선거 불참을 선언하면서 한국민주당과 독립촉성회의 대결로 압축된 선거였으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한국민주당 3명[신일용·부안읍·조선일보 고문, 김형일·보안면·농업, 백남기·상서면·청년단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2명[조재면·백산면·부안 군수, 신영발·농업·사퇴],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1명[조기정·부안읍·교원], 무소속 1명[김수현·부안읍·목사]이 출마하였다.
[결과]
5·10 선거 결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의 조재면(趙在勉)[1900~피랍]이 당선되었다. 조재면은 득표율 40.46%인 1만 9098표로 차점자인 한국민주당의 김형일이 얻은 1만 2298표[26.06%]에 비해 7,000여 표를 더 얻은 압도적인 당선이었다. 다음으로 신일용 7,550표[16%], 김수현 4,460표[9.45%], 백남기 2,743표[5.81%], 조기정 1,048표[2.22%]의 순이었다. 조재면은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출신으로 광복 후 부안 군수를 지냈고 백산면 독립촉성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1948년의 5·10 선거로 남한에 제헌 국회가 구성된 후,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남한에서는 단독 선거에 대한 반대 의견이 존재했고, 남북 협상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선거에 불참하였다. 이어 1948년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과 북의 대립은 한 민족 두 국가라는 아픔을 안고 적대적인 관계로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