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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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左右翼對立 |
영어공식명칭 | Conflict Between the Leftists And the Rightist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7년 3월 22일 - 전라북도 부안 지역 좌익 세력의 24시간 총파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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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6일 - 전라북도 부안군 보도 연맹원 100여 명 학살[상서면 개암사 옆 야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19일 - 전라북도 부안군 보도 연맹원 40여 명 학살[줄포면 줄포리 후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20일 - 전라북도 부안군 보도 연맹원 30여 명 학살[진서면 여룬개 골짜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20일 - 전라북도 부안에 북한 인민군 들어옴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27일 - 전라북도 부안군 우익 인사 수십명 학살[백산면 평교리 망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28일 - 부안군당 좌익 간부와 남파 군인민위원회 간부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으로 퇴각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독립촉성회 부안지부|대한청년단|서북청년단|부안읍교회|국민 보도 연맹 |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에서 1950년 6·25 전쟁 전후 시기에 전라북도 부안에서 발생한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
[개설]
광복 직후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악질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청년들의 활동과 함께, 좌익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온 뒤에는 우익도 힘을 가지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와 함께 좌우익이 대립하기 시작했고, 국민 보도 연맹 사건을 계기로 좌우익 대립은 반대편을 살상까지 하게 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국민 보도 연맹 사건 이후 전라북도 부안이 북한군에 점령당하며 우익 세력의 피해가 컸고, 9·28 수복 후에는 좌익 세력의 피해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좌우익 대립 은 크게 세 가지 배경을 갖는다. 첫째는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좌익을 불법화하고 우익 중심의 정책을 펴면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둘째는 1945년 12월에 이루어진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결정에 우익은 반탁을, 좌익은 찬탁을 주장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마지막은 6·25 전쟁으로 좌우익 대립이 첨예화되며 서로의 생명까지 빼앗는 비극적인 민간 학살로 이어졌다.
[경과]
1. 광복과 좌우익
광복과 함께 전라북도 부안에서도 부안 극장[전 소화 극장]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발기 대회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무력을 가진 일본 군인들이 방해를 할 정도였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신기원[대한청년단장]을 중심으로 치안대를 조직했고, 청년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화급을 요하는 가장 중대한 사안이 사회 안녕과 질서임을 알렸다. 이와 함께 원한에 쌓인 앙갚음과 싸움 방지, 산림 남벌 단속, 적산 가옥과 가재도구의 탈취 방지 등에 앞장섰다.
2. 신탁 통치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은 좌우 대립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었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독립촉성회 부안지부가 부안읍교회 김수현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며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각 정당, 사회단체, 종교 단체가 일제히 궐기하여 ‘신탁 통치 결사반대’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가지를 행진했고, 부안 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많았다. 젊은이들은 혈서를 써서 독립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기독교 단체로는 부안읍교회 교인들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근처의 동진면 당상리, 상서면 용서리, 오중리, 주산면 갈촌리 등의 교회 교인들이 합동으로 대열에 참여했다.
공산당 계열은 정당과 사회단체를 규합하여 찬탁 운동을 벌였지만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반탁 열기가 강한 탓에 찬탁 운동은 역부족인 상태였다.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와 부안읍에서는 좌익 활동가의 집안을 빨갱이 집이라 부르며 테러를 가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에서는 대한청년단의 테러단과 상서면의 백 아무개가 이끈 테러단의 악명이 높았다. 특히 전라북도 부안 주민들은 정읍 서북청년단의 테러를 가장 무서워했다. 정읍 서북청년단의 테러는 사람을 살상도 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3. 6·25 전쟁 전후 좌우익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 보도 연맹 사람들이 아무런 절차도 없이 집단으로 학살을 당했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1950년 7월에 세 차례에 걸쳐 170여 명이 학살을 당했다. 북한군의 점령 시에 협조할 사람을 미리 처형하는 예방 학살이었다. 정부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 연맹 회원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누가 진짜 좌익이고 아닌지를 가려내지도 않고, 가려내는 절차도 없이 학살해 버렸다.
북한군이 들어오기 전에 전라북도 부안의 일부 우익 인사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경찰서 직원들, 반공 단체 청년들, 보도 연맹 직원들도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 남아 있지 않고 미리 떠났다. 인민군이 전라북도 부안 지역 점령과 함께, 인민위원회가 경찰과 경찰 가족, 우익 인사들을 체포해서 내무서[경찰서]에 가두었다. 이어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진 다음부터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이 퇴각하던 날 가둔 자들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근처에서 학살했다.
[결과]
전라북도 부안 사람들도 좌우익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두 사상 중 하나만이 진리요 살길인 양 서로를 적대시하며 싸웠다. 형제지간도 좌우익으로 나뉘어 싸우고, 오래도록 같은 지역에서 피를 나누며 같은 조상을 섬겼던 친척들도 둘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고 증오하며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자행했다. 결국에는 상대방의 목숨까지 뺏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전라북도 부안의 지역 사회에서도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광복 후 한민족의 최대 과제는 친일파 청산과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이 되어야 했다. 민족 구성원들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이었지만, 많은 구성원들이 좌와 우로 나누어 싸우기에 바빴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이나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등한시 한 채, 서로를 적대시하는 비극적인 상황만 연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