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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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山大會 |
영어공식명칭 | Baeksan Convention |
이칭/별칭 | 백산 기포,백산 봉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 8-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발단 시기/일시 |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 고부 봉기로 동학 농민 혁명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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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894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 무장 기포로 봉기 확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 백산 대회 시작 |
종결 시기/일시 |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 백산 대회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백산 대회 시작 장소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
종결 장소 | 백산 대회 종결 장소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
관련 인물/단체 |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오시영|최경선|송희옥|정백현 |
[정의]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성에서 동학 농민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대내외에 알린 대규모 군중집회.
[개설]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수탈을 계기로 고부에서 봉기한 민중의 일부가 백산성(白山城)으로 이동하여 성을 수리하며 머물렀고, 전봉준(全琫準) 등이 무장(茂長)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백산에 모임으로써, 동학 농민군이 혁명군으로서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함께 혁명의 대의를 밝힌 격문,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의 군율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로써 백산성은 동학 농민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곳이 되었고, 동학 농민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황토현(黃土峴) 전투의 출발지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현재의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은 동학 농민 혁명 당시에는 전라도 고부군 관할이었다. 백산(白山)은 백산 대회가 개최된 곳으로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8-1에 있으며, 높이가 47.4m에 불과한 야산(野山)이다. 낮은 산이지만 동진강(東津江)과 고부천 사이에 위치하여 고부·김제·태인·정읍·부안 등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백제 때 성을 축조한 것이었다. 또한 ‘고부 백산은 가히 만민이 살 수 있는 곳[高阜白山可活萬民]’이라는 말이 전해지는 옥야천리(沃野千里)의 기름진 들판이 펼쳐진 풍요의 땅으로 민중에게는 길지(吉地)였다. 따라서 고부에서 거사를 일으킨 고부 봉기 지도부가 백산을 전략적 거점으로 정하고, 백산에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여, 백산 대회를 개최하였다.
[경과]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고부 관아를 점령한 민중은 백산으로 이진(移陣)한 뒤, 백산 남서쪽 아래에 있는 매안리[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내마을]에 군량을 비축하고, 백산성을 축조하며 장·단기전에 대비하였다. 또한 말목 장터와 백산을 오가며 봉기의 지속과 확산을 모색했으며, 줄포 세고[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를 점령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사냥꾼에게서 무기를 징발하는 등 군사력을 갖추고 무장[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당시 무장현]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세를 확장하였다.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백산에 모인 전라도 각지의 민중들이 백산 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아주 많은 민중들이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들고 모여 ‘앉으면 죽산이요, 일어서면 백산이라.’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동학 농민군은 백산 대회에서 총대장(總大將) 전봉준, 총관령(總管領) 김개남(金開南)[1853~1895]·손화중(孫華仲)[1861~1895], 총참모(總參謀) 김덕명(金德明)[1845~1895]·오시영(吳時泳), 영솔장(領率將) 최경선(崔景善), 비서 송희옥(宋憙玉)·정백현(鄭佰賢) 등으로 혁명군의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이와 함께 혁명의 대의를 밝히는 격문(檄文)을 발표했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학계에서는 1월 17일은 정황상 맞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을 도탄(塗炭)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盤石)[반태산(磐泰山)]의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강포(强暴)한 도적[강적(强賊)]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兩班)과 부호(富豪)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과 방백(方伯) 수령의 밑에서 굴욕(屈辱)을 당하는 힘없는 아전[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 정월 십칠일(甲午 正月 十七日)
호남창의소 재고부백산(湖南倡義所 在古阜白山)
또한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생물 역시 함부로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없앤다.] 와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① 항복한 자는 대접한다. ②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③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④ 순종한 자는 경복한다. ⑤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⑥ 굶주린 자는 먹인다. ⑦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⑧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⑨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⑩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⑪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⑫ 불효자는 죽인다. 위의 조항은 우리들이 거행(擧行)하는 근본이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옥(地獄)에 가둘 것이다.]의 규율을 선포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부안 관아를 점령한 뒤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하였다.
[결과]
동학 농민군은 백산 대회를 통해 지도부를 조직하고, 격문과 사대 명의, 그리고 12조 군율을 선포하여 동학 농민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대내외에 알렸다.
[의의와 평가]
백산 대회 는 고부 봉기와 무장 기포를 거쳐 백산에 집결한 민중을 혁명군으로 조직하고, 혁명의 대의를 밝힌 격문과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할 군율을 선포함으로써 동학 농민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대내외에 알린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초기 전개 과정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동학 농민 혁명은 근대사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일제 강점기 3·1 독립 만세 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