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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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革命 |
영어공식명칭 | Donghak Peasant Revolution |
이칭/별칭 | 동학 농민 전쟁,동학 농민 운동,동학 혁명,동학 운동,동학란,동학당의 난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발단 시기/일시 | 1894년 1월 10일 - 고부 봉기 이후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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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894년 - 부안 동학 농민군의 집결과 도소[집강소] 운영 |
종결 시기/일시 | 1895년 - 동학 농민 혁명 종결 |
성격 | 농민 항쟁 |
관련 인물/단체 | 전봉준|김낙철|김낙봉|노대규|노입문|박문표|김봉보|송성구|김석윤 |
[정의]
1894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봉건적 착취·수탈과 일본 등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일어난 민중의 자주적 사회 변혁 및 근대화 운동.·
[개설]
동학 농민 혁명 은 1893년 11월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결의한 ‘사발통문 거사 계획’에 이어, 이듬해 1월 10일의 고부 봉기와 3월 20일의 무장 기포를 거쳐, 3월 26일의 백산 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黃土峴) 전투와 황룡(黃龍)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전주성을 점령했으나, 겁먹은 정부가 청에 원병을 청하면서 청국 군대에다 일본 군대까지 개입하는 민족적·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정부의 폐정 개혁 실시를 조건으로 전주성에서 철수했다가, 폐정 개혁이 지지부진하자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직접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 뒤 일본군의 경복궁(景福宮) 점령과 청일 전쟁 등을 계기로 구국 항일 의병 전쟁을 일으켰으나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패배하고, 1895년 3월 전봉준(全琫準)[1855~1895]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순국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학 농민 혁명 때 전라북도 부안은 고부 봉기가 일어난 정읍은 물론 무장 기포가 일어난 고창과 이웃한 지역으로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다. 당시 부안에서는 김낙철(金洛喆) 대접주와 부안 현감이 관민 상화의 원칙에 따라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분열과 갈등은 물론 보복과 살인 등이 거의 없이 평온한 가운데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차 봉기에서는 일본군과 관군의 무력 진압과 함께 부안 읍성 남문 밖에서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는 희생이 있었다.
[역사적 배경]
동학 농민 혁명 은 조선 후기 60여 년간 지속한 세도 정치로 인한 정치 기강의 문란, 삼정(三政)의 폐단으로 인한 농민의 피폐한 삶,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불리는 서양 세력의 압박에 따른 위기의식의 고조, 동학의 창도와 전파 등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조선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물론 관리들의 수탈과 착취에 맞선 사회 개혁을 우선으로 하고, 서양 세력의 경제적, 문화적 침투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다.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의 동학 농민 혁명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 부안을 방문 한 후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開花於扶安 結實於扶安]’라는 법설을 남길 정도로 동학의 교세가 확장했던 점이 주요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안 대접주 김낙철이 지역에서 인망(人望)이 높았고 동학 교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점은 부안 지역의 동학 농민 혁명이 보였던 상대적인 온건성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과]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봉기가 일어났을 때, 부안 대접주 김낙철은 해월 최시형에게 동생 김낙봉(金洛鳳)을 보내 향후 대책을 물었고, 혁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 혁명 지도부와 다른 행보를 취하였다. 즉, 부안 현감과 유림의 요청에 따라 일찍이 부안읍과 줄포에 도소를 설치하고 질서를 유지했으며, 굶주림 상태에 있는 제주 도민이 줄포에 상륙하여 식량을 구할 때에는 애민과 애휼 정신으로 적극 협조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상경하지 않고 지역에 남아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후방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
고부 봉기 이후 부안 현감과 유림의 요청에 따라 부안 대접주 김낙철이 도소를 설치하고 부안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부안은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보복과 살인 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 이후에는 노대규와 노입문이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박문표, 김봉보, 송성구 등이 부안성 남문 밖에서 관군에게 처형되었다. 이 외에도 성명 미상의 9명이 남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성명 미상의 27명도 처형되었으나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1895년 3월에는 거괴로 알려진 김석윤(金錫允)까지 처형을 당하는 참사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우리 근대사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를 받는 동학 농민 혁명 당시 부안은 ‘앉으면 죽산이요, 일어서면 백산이라.’로 상징되는 백산 대회가 개최된 역사의 현장이고, 해월 최시형이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고 예언한 희망의 공간이었으며, 소통과 화합을 통한 상생이 공존한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