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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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蝟島鎭 |
영어공식명칭 | wydo_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제정 시기/일시 | 1682년 - 위도진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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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지역 | 위도진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에 설치한 수군진.
[개설]
위도진은 군산 선유도의 군산진과 함께 황해의 길목에 자리하여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호남 지역의 중요성과 강화도 방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라도 입암(笠岩), 금성(金城), 격포 등지에 성을 쌓아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또한, 중국 어선이나 상선 등 외국 배인 황당선(荒唐船)이 황해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등 국제 정세가 변화하자 이 지역 방어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17세기 후반이 되면 인구가 증가하면서 섬 지역으로도 많은 사람이 유입되자 황해안[서해안] 방어 체제 구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황해안의 섬들을 중심으로 진(鎭)이나 읍(邑)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때 조정의 주요 현안이 되었다. 위도를 비롯한 황해안 도서 지역은 풍부한 어족 자원으로 인하여 어전(漁箭)[어살]이 활성화되고 어선 어업이 발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해운업이 발달하였으며 조운이 확대됨에 따라 연안 해로의 안전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위도에 진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17세기 초인 1629년(인조 7) 전라 감사 권태일(權泰一)이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권태일은 위도와 고군산에 진을 설치하면 바닷길의 문호가 되므로 호서 지역의 여러 진과 서로 호각지세(掎角之勢)가 되며, 마량(馬梁), 서천(舒川)과도 서로 순치가 되는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정에서 황해 도서 지역에 설진(設鎭)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이를 요구하였다.
전라 감사와 병조 판서를 거쳐 이 지역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인 민유중(閔維重)은 위도의 인구 증가를 이유로 위도진 설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민유중이 위도진을 주장한 이유들을 보면 첫째는 위도는 황해안 지역을 왕래하는 선박 모두가 거쳐 가는 해로의 요충지이며, 둘째는 위도의 백성이 400여 호나 되어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셋째 위도와 주변의 풍부한 어획량으로 인한 어세(漁稅) 수입으로 별도의 비용 없이 진(鎭)을 운영할 수 있다고 하였다. 민유중은 이미 강진의 고금도(古今島)와 청산도(靑山島)에도 진을 설치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위도와 함께 나주의 지도(智島)에도 진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민유중의 주장에 이어 전라 감사 조세환(趙世煥)의 보고가 이어져 위도에 진을 설치하는 문제가 결정되었다. 처음에는 만호(萬戶)를 파견하고 병력이 많아지면 첨사진으로 올리기로 하고, 부안의 전선(戰船)을 넘겨받아 시작하도록 하였다. 처음 만호가 임명되었지만 제대로 부임하지 못하자, 처음부터 당상관 중에서 첨사(僉使)를 파견하도록 결정하여 위도진은 실제로 1682년(숙종 8)에야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난중일기(亂中日記)』[1597년(정유년, 선조 30)]에 “9월 20일[양력 10월 30일] 무신. 맑고 바람도 순조로웠다.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이광축, 이지화 부자가 와서 봤다[二十日戊申. 晴. 曉. 開船直到蝟島 避亂船多泊. 李光軸,李至和 父子來見].”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전라도 부안 진보 조에는 “위도진은 현의 서쪽 150리에 있다. 첨사는 무과 급제자로 종3품이다. 군관 13명, 진리 15명, 지인(知印) 8명, 사령 10명, 군뇌(軍牢) 7명이다. 우수영에 속한다[蝟島鎭 在縣西一百五十里 僉使武從三品 軍官十三 鎭吏十五 知印八 使令十 軍牢七 右水營屬].”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軍政篇)」4에는 “주사(舟師), 전라 우수영, 위도(蝟島)-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부안 위도진은 조선 숙종 8년[1682년] 진을 두어 당시 해군 무관이었던 첨사(僉使)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주재하여 사법, 행정권을 통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5의 1419년(세종 1) 8월 11일에는 “경기좌도 수군첨절제사 이각(李恪)이 병선을 더 만들고 수군을 증원할 것을 상서하면서, ‘1. 병선을 더 짓는 것이 오늘 시급한 일입니다. 적의 병선은 백으로 세어야 하겠거늘, 각 포구의 병선이 많다 하여도, 5, 6척에 지나지 못하니 불가불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배를 짓게 하였으니, 경기·충청·전라·경상도에서도 병선을 더 지어서 좌우령(左右領)으로 나누어 두었다가, 경보가 있으면 한 영(領)은 항상 해변 둘레를 지키고 한 영은 요충 되는 땅인 경기도의 덕적도(德積島), 황해도의 백령도(白翎島), 평안도의 목미도(木彌島), 충청도의 연도(烟島), 전라도의 위도, 경상도의 거제도 같은 여러 섬을 비밀히 지키다가, 혹시 땔나무를 채취하거나 물을 긷는 적군을 만나게 되면, 불의에 뛰어나가 기회를 타서 돌격하면, 왜구가 도망가고 굴복하여 감히 근접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23년 기미[1799년] 4월 9일[정유]에는 “여러 도의 감사·병사(兵使)·수사(水使) 및 수령·변장(邊將)의 겸함(兼銜)은 별단(別單)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위도 첨사는 위도진 수군첨절제사(蝟島鎭水軍僉節制使)로 한다. 검모포 만호(黔毛浦萬戶)는 위도진관 검모포 수군만호(蝟島鎭管黔毛浦水軍萬戶)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위도진은 처음에 자리 잡을 때까지 만호가 파견될 예정이었지만 김몽두 등 임명된 자들이 제대로 부임하지 못하고 곧바로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진으로 승격되었다. 처음에 임치진 소속의 제진이었던 위도진이 첨사진이 되자 임치진 휘하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임치진은 거진이었지만 첨사가 당하관이었고 위도 첨사는 당상관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치진 밑에 두기보다는 독진(獨鎭)으로 편성하여 위도와 가리포에 수군 진관을 설치하고, 위도에는 임치, 고군산 등 8곳, 가리포에는 고금도, 남도포 등 8곳을 소속시켜 위도와 가리포가 거진(巨鎭)으로 자리 잡았다.
위도가 처음부터 거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 바다에서의 어획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위도는 조선 전기부터 어전이 발달한 곳이어서 성균관에 사여되어 양현 재정으로 활용되었다. 양란 이후 국가 재건기에 국방력 강화가 국정 현안으로 대두되면서 위도를 비롯해서 성균관이 거두던 여러 섬의 수세권이 국방 재정에 활용되었다.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첨사가 파견되어 거진의 지위에서 주변 제진을 관할하게 된 것도 국방상의 요충지 이외에 풍부한 어전세(漁箭稅)가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강화도가 도성의 인후(咽喉)로 인식되면서 위도와 격포진을 강화시켜서 강화도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받도록 하려는 정책도 한몫 담당하였다. 이에 위도진에서 수세를 전담하여 위도 어전의 절수처인 성균관에 정액을 지급하여 주고 잉여분을 해방(海防) 경비로 사용하였다. 17세기까지 어전의 설치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어선을 이용한 어선 어업도 발달하면서 전체적인 어획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로써 위도 한 곳에서 성균관뿐 아니라 전라 감영, 위도진 등 여러 곳의 수세가 가능하였다.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위도에는 많은 백성이 모여들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섬에 들어가는 입도(入島)가 합법화되면서 육지에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이 어염(魚鹽)의 풍요로움을 찾아 위도로 대거 이주하였다.
[변천]
『문헌비고』 해방(海防) 조에 “위도진은 [부안현의] 서쪽 150리에 있으며, 해안에서 50리 떨어져 있다. 둘레는 35리이다. 숙종 8년에 설치하였으며, 첨사가 주둔하는 진이다[蝟島 在西 一百五十里 支岸五十里 周三十五里, 肅宗八年 設僉使鎭.”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1682년(숙종 8) 위도진을 설치하여 첨사[종3품 무관]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문헌비고』 병고주사(兵考舟師) 조에는 “숙종 9년[1683년]에는 위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고 가리포, 차임류, 고군산, 우포, 다경포, 법성포, 검모포, 군산포 지도 8보를 위도에 소속하게 하였다[肅宗九年設水軍鎭營於蝟島 加里浦 次臨溜 古群山 古浦 多慶浦 法聖浦 黔毛浦 群山浦 智島八堡 屬蝟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전라 우수영의 관할 구역이 광역이었으므로 진관 하나를 위도에 두어서 옛날의 도만호(都萬戶)처럼 첨사와 만호진을 관할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지도서』에는 “위도진은 첨사가 주관한다, 군관 13명, 진리 15명, 지인 8명, 사령 10명, 군뢰 7명이 있다. [전라] 우수영에 속한다[蝟島鎭 僉使, 軍官 十三, 鎭吏 十五, 知印 八, 使令 十, 軍牢 七, 右水營屬].”라고 하여, 종3품의 첨사 아래에 53명의 인원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후반 이후 남중국해를 장악하고 있던 정금(鄭錦) 세력에 대한 대비의 필요성과 함께 서남해 도서 지역의 개발과 백성들의 유입 등으로 인해 전라도 연해 지역 방비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전라도의 수군 방어 체제가 좌수영의 사도 진관 예하 6개 진, 6개 군현과 우수영의 임치, 가리포, 위도 진관 예하의 14개 진과 6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위도는 청어 잡이로 유명한 곳이며 매년 봄, 여름 상선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룰 정도로 어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위도 어전은 성균관의 절수처여서, 전세와 특산물에 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점도 위도에 진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위도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주요 유배지 중 하나로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면 장찬(張燦), 유명견(柳命堅), 이명희(李命熙), 여선장(呂善長), 김치후(金致垕), 이흥종(李興宗), 윤태연(尹泰淵) 등이 유배된 곳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