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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43
한자 高麗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류호석

[정의]

서기 918년부터 서기 1392년까지 존속하였던 고려 시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의 중심 부령현과 경제의 중심 보안현]

고려 시대 부안 지역은 부령현(扶寧縣)보안현(保安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두 현을 합치면서 각기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부안현(扶安縣)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이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부안은 하나의 고을이 아니라 두 개의 고을로 계속 나누어진 상태였으며 이것은 그 전인 백제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령현은 지금의 부안군 북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부안읍(扶安邑)동진면(東津面), 계화면(界火面), 하서면(下西面), 상서면(上西面) 동북부와 주산면(舟山面) 등지이다. 보안현은 지금의 부안군 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보안면(保安面), 줄포면(茁浦面), 진서면(鎭西面), 변산면(邊山面), 상서면(上西面) 서남부 등 변산 일대이다.

이들 두 지역은 고려 건국 이래 오랫동안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궁벽한 곳이었다. 조선과는 달리 왕조의 말기까지도 지방 곳곳에 수령이 모두 파견되지 않았던 고려 때에는 주군현과 속군현 제도를 통해 지방을 다스렸다. 즉 수령이 없는 속군현은 이웃한 주군현의 수령이 아울러 다스리는 형식을 취하였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誌)」에 따르면 부령현보안현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으로, 전라도 전주목(全州牧) 고부군(古阜郡)의 관할이었다. 따라서 고부 군수는 고부군뿐 아니라 이들 지역도 함께 다스렸다.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이웃 수령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던 이들 두 지역에서는 토착 향리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고려 후기 예종(睿宗) 대 이후 어느 땐가 부령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감무는 고려 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수령이 없는 고을에 파견한 하급의 외관(外官)으로, 그 숫자는 예종 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200여 곳에 이르렀다. 이들 감무는 1413년(태종 13) 모두 현감(縣監)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그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다. 한편 보안현에 감무가 파견된 것은 고려 후기인 1386년(우왕 12)이다. 따라서 한동안은 부령현의 감무가 보안현의 업무까지 맡아 본 셈이 되는데, 그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당 기간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 시대의 부안 지역에서는 보안현이 아니라 부령현이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부령현이 부안의 북부 지역으로 수도 개성과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어 남부 지역인 보안현에 비해 행정상 통제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남부에 있던 보안현변산위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낭주(浪州)라는 별호(別號)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또 고려청자의 도요지가 있는 지금의 유천리진서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보안현에는 고려 시대 전국에 설치된 12곳의 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어 조세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조운(漕運)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북부의 부령현을 포함하여 인근의 고을에서 거둔 조세는 일단 이곳 안흥창에 모두 모였다가 뱃길을 통해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구은 자기들 역시 같은 항로를 통하여 운반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변산반도의 서남 해안은 당시 고려와 송나라 간의 국제 무역이 이루어졌던 이른바 남선 항로(南線航路)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히 많은 사람이 이곳을 드나들게 되었다. 변산에는 또한 조선(造船)에 필요한 목재가 풍부하여 토목 공사가 활발하였다. 조그마한 이 지역의 포구(浦口)가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면서 활기가 넘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행정의 중심은 당시 북부인 부령현에 있었지만 경제의 중심은 남부인 보안현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문화의 전통]

부안 지역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 불교문화의 흐름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곳 나름의 불교적인 전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특히 변산은 ‘영산(靈山)’이라고도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경관과 산세로 인하여 예로부터 많은 사찰과 암자가 들어섰으며, 불자(佛者)의 수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미 백제 시대에 이곳에는 내소사(來蘇寺)개암사(開巖寺)가 창건되어 있었다. 현재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내소사는 백제 무왕(武王) 34년인 633년 혜구(惠丘)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仁祖) 때 중건하였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찾아와서 시주하였기 때문에 ‘소래사’라는 이름에서 ‘내소사로’ 바뀌었다는 전설이 전할 만큼 유서 깊은 사찰이다. 오늘날 전하는 『부안읍지』[1931]의 ‘사찰’ 조에 정지상(鄭知常), 이곡(李穀) 등 고려 시대 문인과 원감(圓鑑), 선탄(禪坦) 등 선승이 찾아와 소회를 읊은 시(詩)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명망 있는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내소사에는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부안 내소사 동종이 보존되어 있는데, 본래는 변산 청림사(靑林寺)의 종으로, 청림사가 폐사되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856년(철종 7) 내소사로 옮겼다고 한다. 동종의 표면에 ‘1222년(고종 3)에 주조되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 있어, 고려 후기에 청림사라는 사찰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내변산의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자리 잡은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689년(신문왕 9) 초의 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시대에 와서 다시 중건하였다. 위의 내소사, 청림사, 실상사와 함께 지금의 보안면 우동리 선계골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계사(仙溪寺)변산에 있던 많은 사찰 중에서도 4대 사찰로 꼽히는 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소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져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사찰 이외에 암자로는 크고 작은 것이 수백 개나 있었다고 전하지만 창건 시기나 활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부사의방장(不思議房丈)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며, 원효방은 신라의 원효 대사(元曉大師)가 수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들은 고려 시대에도 이규보(李奎報)를 포함하여 많은 문인과 불자가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 의상암(義相庵)은 원효 대사와 같은 시기 신라 고승 의상(義湘)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변산의 많은 사찰과 암자의 존재는 이 지역이 당대 불교의 이름난 가람이었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사찰들의 존재 이유를 단지 변산이라는 지역의 산세와 경승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불교가 귀족 불교와 사원 경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부안 지역의 사찰 역시 어느 면에서건 중앙의 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며, 사찰의 운영에서 경제적인 요인 또한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부안과 중앙 귀족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구(金坵), 정지상(鄭知常), 이곡(李穀)의 경우나, 이곳에 공무로 나왔다가 유명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남긴 이규보의 경우에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이건 사적이건 중앙의 관료가 사찰에 드나드는 일은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와는 달리 고려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경제적인 요인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이곳이 조창 지역으로 조운의 한 중심지이자 해상 교통의 요충지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 그리고 고려청자를 구웠던 가마터가 줄포만을 따라 즐비하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목재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조선소도 바로 이곳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인력과 물자도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 포구를 중심으로 하여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부안 지역 사찰들도 시주 등을 통하여 경제적인 넉넉함을 누리며 번창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찰은 또한 고려청자 가마와 관련이 적지 않았다. 사찰이나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보급된 당시의 차 문화 내지 자기 문화로 인하여 각종 다기류를 포함하여 청자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부안 지역의 청자 가마는 왕실과 귀족 사회의 수요에 부응하여 생활 자기와 장식용 자기를 많이 제작하였다. 유천리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각종 용문 청자 편은 유천리 가마와 왕실과의 관련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대형 청자 매병에 장식된 용의 문양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매병의 수요자가 왕과 왕실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볼 때 부안 지역의 불교문화는 수도처로서의 영산, 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 못지않게 해안 지역으로서 외래문화와 토착 문화의 접점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수운과 조선 및 도요지라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융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해 해양 문화권의 요충지]

부안 지역은 해안선이 매우 길며, 황해로 불쑥 삐져나와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모양을 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위도면의 섬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곰소만을 아래에 두고 있다. 이 같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부안은 이미 오랜 옛적부터 대외 교류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보듯이 이곳은 백제의 대외 교류의 한 통로였다. 죽막동과 수성동 주변의 발굴 조사 결과 백제의 유물뿐 아니라 가야, 중국, 왜[일본]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특히 그 유물들이 이곳을 지나는 국내외 선박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 지낼 때 사용했던 유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이곳이 당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졌던 중요한 중간 기항지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변산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청동 사자’ 설화와 ‘개양 할미’ 설화는 채석강을 포함한 변산 일대가 일종의 표식과 등대 역할을 하였던 곳임을 보여 준다. 죽막동은 항해 표식을 포함해 이곳 해안으로 들어가는 물목이었으며, 항해자들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왕건(王建)의 고려 건국 설화에서도 이미 등장하는 중국 상인의 내항은 양국 사이에 정식으로 국교가 열리는 962년(광종 13) 이래 시작된 조공 무역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처럼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부안 지역은 대외 무역은 물론 국제적 문화 교류에서도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고려[Korea]가 한반도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진 것도 바로 이 시기다.

황해를 통하여 이루어진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무역 활동은 고려에서는 수도 개성에서 황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의 예성항(禮成港)과, 중국에서는 동남 해안에 자리 잡은 북부의 명주(明州)와 남부의 등주(登州)를 각각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이들 동서의 각 항구 사이에는 남선 항로(南線航路)와 북선 항로(北船航路)의 두 길이 열려 있었다. 북선 항로는 산둥반도의 등주(登州) 방면에서부터 요동반도 연안을 따라가다가 동북쪽으로 거의 직선 코스를 밟아 압록강구와 대동강구의 초도(椒島)를 경유하여 해안선을 따라 남하한 후 예성항에 이르는 항로이다. 이 항로는 신라 시대에도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었으며 고려 전기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한편 남선 항로는 명주에서부터 동북쪽으로 흑산도에 이르러 다시 동북행 하여 위도, 군산도[지금의 선유도], 갈도, 마도, 자연도 등 반도의 황해안[서해안] 근해 도서를 거쳐 예성항에 이르는 항로이다. 이 항로는 대체로 왕조의 후기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고려 및 송나라와 요, 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북선 항로의 이용이 위험해지자 개척된 항로였다. 고려청자를 가득 싣고 항행하다 좌초하였던 난파선들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었던 전라도 군산 및 충청도 태안 마도 앞바다는 이 남선 항로의 선상에 자리 잡은 길목이었다.

부안의 죽막동위도 일대 역시 이 남선 항로의 길목에 있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예종(睿宗) 때 고려에 올 당시 이용한 항로가 다름 아닌 이 남선 항로였다. 명주에서 출발했던 서긍은 목적지인 예성항에 도착하기에 앞서 도중에 군산도(群山島)에 잠시 기착하여 영송(迎送)의 의례(儀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남선 항로를 이용하여 중국에서 사신이 오갈 경우 군산도(群山島)와 자연도(紫燕島), 그리고 위도 등 중간 기항지에서 영송의 의례를 행하였다. 군산도에는 이들 사신이 머무는 객관(客館)이 있었는데, 위도에도 그와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위도죽막동을 중심으로 하는 변산반도 지역은 다른 내륙 지역과 달리 일찍부터 외래 문물과 접촉하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줄포만 지역에는 조선소뿐 아니라, 주변의 진서리우동리, 신복리, 유천리 등지에 고려청자를 생산하는 도요지가 많았다. 목재가 풍부하며 좋은 흙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해상 교통로가 발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 제작된 자기들은 조세미와 똑같은 뱃길을 따라 중앙으로 올라갔다. 이곳의 자기는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중국에까지 수출되면서 줄포만 일대는 자기 산업의 중요한 구심점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13세기 후반 이후 유천리 도요지에서 제작된 상감 청자의 형태와 문양이 중국 경덕진의 원 황실용 청화 백자와 같은 형식을 띤다는 점은 이곳이 도자 기술의 중요한 국제 교류 현장의 하나이자 국제적인 자기 제작소였음을 보여 준다.

한편 부안 지역에는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서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한 불교문화도 자기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줄포만변산의 황해안 일대는 남선 항로를 따라 외래 문화를 수용하면서 조선과 자기, 그리고 불교문화라는 내적 요소를 결합하면서 부안 지역 나름의 독특한 해양 문화권을 형성, 발전시켜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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