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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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韓時代 |
영어공식명칭 | Samhan sidae|Three Han Period |
이칭/별칭 | 마한 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기원 전후부터 300년쯤까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역사.
[마한의 상황]
관련 기록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 남부에는 1~2개의 소규모 정치체(政治體)가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결국엔 78개가 세워질 정도로 성장,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부안과 연관된 경기도, 충청도 및 전라도 일대의 마한 지역에는 54개의 정치체가 지역 단위로 독립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였다. 여러 마을[邑落]이 결속하여 하나의 소국으로 발전하고, 소국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대국화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소국 상태에서 소멸되기도 하였다.
이런 정치체의 형성과 발전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작은 규모는 대략 면(面) 단위 3~4개를 합친 정도이고, 큰 곳은 1개 군(郡) 단위로 이해된다. 또 인구는 대국이 1만 여 호, 소국은 수천여 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국을 백제의 전신인 백제국(伯濟國)과 마한 연맹의 영도국인 목지국(目支國)이라고 한다면, 두 대국을 합하면 1만여 호 정도이고, 나머지 50여 국은 1,600호 정도로 소국들인 셈이다. 따라서 1가구당 5인 가족을 기준으로 인구를 추정한다면 대국은 5만여 명, 소국은 7,000~8,000여 명 정도로 볼 수 있다.
[마한과 부안의 지반국]
현재까지도 마한 54개국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등 큰 강의 유역을 중심으로 밀집도가 높았을 것이며,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금강과 동진강, 만경강에 여러 정치체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추정을 통해 불사분사(不斯濆邪)[전주시], 건마(乾馬)[익산시 금마면], 감해(感奚)[익산시], 여래비리(如來卑離)[익산시 여산면], 비리(卑離)[군산시 옥구읍·회현면], 만로(萬盧)[군산시 옥구읍], 임소반(臨素半)[군산시 옥구읍], 벽비리(辟卑離)[김제시], 구사오단(臼斯烏旦)[김제시 금구면], 일리(一離)[부안군 보안면], 지반(支半)[부안군], 구소(狗素)[정읍시 고부면], 불미(不彌)[정읍시 정우면], 첩로(捷盧)[정읍시], 초산도비리(楚山塗卑離)[정읍시], 모로비리(牟盧卑離)[고창군], 신소도(臣蘇塗)[고창군 흥덕면], 고랍(古臘)[남원시] 등 17여 국이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부안의 지반국(支半國)이란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부안 지역이 이미 백제 건국 이전부터 마한의 일원으로 성장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 지반국이 어떠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있었는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백제의 남하와 지반국의 복속]
백제는 금강 이남 지역을 적극 경영하기 위해 마한과 끊임없이 투쟁하여 서기 4세기 초, 적어도 만경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백제는 이후 다시 남하하게 되는데, 이때 지반국과 조우하게 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가 군대를 이끌고 낙동강 일대 경상도의 비자발[창녕시], 남가라[김해시], 안라[함안군], 탁국[창원시], 다라[합천군], 탁순[대구광역시], 가라[고령군]를 평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평정군은 서쪽으로 고해진에 이른 후 남만 침미다례[전라남도 강진군·해남군]까지 정벌하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때 백제와 왜 연합군과는 별도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하자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 지역이 스스로 항복하였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전라남도의 끝인 침미다례가 공략을 당하자 거리상으로 떨어진 지반[부안]이나 고사[정읍] 등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들이 침미다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동반 항복한 각 정치체는 단순한 교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나아가 백제의 공격을 받은 침미다례를 지원하거나 함께 전쟁에 참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이 시기까지 부안 지역이 마한의 일원으로 독자적인 영역과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유지하였음을 뜻한다.
한편, 위의 기록에는 출정한 두 갈래의 군대, 즉 근초고왕 부자의 군대와 백제 장군 목라근자 등의 군대가 조우한 곳을 ‘의류촌(意流村)’이라고 하였다. 또 백제의 왕이 벽지산(辟支山)과 고사산(古沙山)에 올라 원정군의 승리 의식을 거행하였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보이는 벽지산과 고사산이 각각 김제와 정읍인 것으로 보아 ‘주류수지’는 ‘주류성’일 수밖에 없다.
결국 백제 남방 정벌의 종착점이 주류성이었다는 뜻인데, 이곳이 이후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생각해 보면 약 3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주류성이란 의미와 역할의 중요성이 예사롭지 않으며, 그만큼 부안에서 차지하는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인식도 재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