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2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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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羅北道各郡邑誌扶安郡 |
영어공식명칭 | Jeonlabuldokakguneupji-Buangu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1899년에 편찬된 『전라북도각군읍지』에 수록된 부안군 읍지.
[개설]
『전라북도각군읍지』에 속한 군들로는 전주(全州), 남원(南原), 고부(古阜), 김제(金堤), 태인(泰仁), 여산(礪山), 금산(錦山), 익산(益山), 임피(臨陂), 금구(金溝), 함열(咸悅), 부안(扶安), 무주(茂朱), 순창(淳昌), 임실(任實), 진안(鎭安), 진산(珍山), 만경(萬頃), 용안(龍安), 고산(高山), 옥구(沃溝), 정읍(井邑), 용담(龍潭), 운봉(雲峯), 장수(長水), 구례(求禮) 등 26개 군을 포함하여 간행하였다. 이 가운데 현재는 전라북도에 속하지 않은 진산[충청남도]과 구례[전라남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편찬/간행 경위]
1899년(고종 36)의 전국 읍지 상송령(邑誌上送令)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1책 152장의 필사본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33.3×23.5㎝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전라북도각군읍지』에는 관찰부·진위대·전보사 등의 명칭이 보이고 상납·전결 항목은 무술조(戊戌條)[1898년]‚ 호구(戶口)는 기해조(己亥條)[1899년]의 내역을 싣고 있는 점으로 보아 1899년의 전국 읍지 상송령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읍지는 모두 통일된 항목과 기재 양식으로 작성되어 내용에서 상략의 차가 적고 항목의 출입이 없다. 이로 미루어 『전라북도각군읍지』는 관찰부에서 일정한 항목을 설정한 뒤 각 읍지에서 필요한 사항만을 일괄적으로 뽑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각군읍지』의 차례는 전주(全州), 남원(南原), 고부(古阜), 김제(金堤), 태인(泰仁), 여산(礪山), 금산(錦山), 익산(益山), 임피(臨陂), 금구(金溝), 함열(咸悅), 부안(扶安), 무주(茂朱), 순창(淳昌), 임실(任實), 진안(鎭安), 진산(珍山), 만경(萬頃), 용안(龍安), 고산(高山), 옥구(沃溝), 정읍(井邑), 용담(龍潭), 운봉(雲峯), 장수(長水), 구례(求禮)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읍지의 목차는 일괄적으로 정하여 지도(地圖)‚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관직(官職)‚ 방리(坊里)‚ 도로(道路)‚ 성지(城池)‚ 산천(山川)‚ 성씨(姓氏)‚ 학교(學校)‚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장시(場市)‚ 교량(橋梁)‚ 역원(驛院)‚ 사찰(寺刹)‚ 누정(樓亭)‚ 물산(物産)‚ 상납(上納)‚ 호구(戶口)‚ 전결(田結)‚ 봉름(俸廩)‚ 조적(糶糴)‚ 고적(古蹟)‚ 관속(官屬) 등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전라북도각군읍지』「부안군」도 같은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전라북도각군읍지』「부안군」 지도[채색]의 영역은 백산면을 제외한 부안군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일대에 있었으며, 서북쪽의 성황산[113m]을 등지고 동남쪽을 향해 위치하고 있었다. 지도는 읍치의 좌향(坐向)을 고려하여 북쪽을 위쪽에 배치하였다. 읍치의 주산(主山)인 성황산을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한 것으로 표시하였다. 읍성 주변에는 모든 고을에 설치된 네 곳의 제사처 중 사단(社壇), 여단(厲壇), 향교[문묘] 세 개만 이름이 적혀 있다.
읍치 뒤편의 산 위에 있는 건물이 성황사(城隍祠)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수군 기지인 검모진(黔毛鎭)이 표시되어 있으며, 왼쪽 가운데에는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모아 놓았다가 수도인 한양으로 옮겨가기 위한 창고인 해창(海倉)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에는 동진강과 만경강이 합해져 새만금 지역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아래쪽에는 곰소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현재는 새만금 방조제에 의해 육지가 된 계화도(界火島)의 모습도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각군읍지』의 내용은 대체로 간략하나 봉름(俸廩)·관속(官屬)조에는 지방 제도 개혁 후의 관원(官員)과 급료액(給料額)이 실렸고‚ 상납(上納)·호구(戶口)·전결(田結)조는 당시의 실정을 반영하는 내역이다. 조적(糶糴)조에는 사환미(社還米)· 석수(石數) 등이 기재되어 있다. 고적(古蹟)조 가운데 남원(南原)의 경우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의 일이 상세히 실려 있다. 풍속(風俗)·형승(形勝)·고사(故事)·인물 관계 등의 항목은 없으며‚ 지방 재정과 관계되는 항목이 중심이다. 이는 『전라북도각군읍지』가 지방 제도 및 지방 재정 실태 파악에 관심이 두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로 미루어 『전라북도각군읍지』는 구한말 전라북도와 함께 부안군의 사정을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