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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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茁浦里 |
영어공식명칭 | Julpo-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범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줄포(茁浦) 지명은 1875년(고종 12) 줄포항이 축조될 무렵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주을래포(注乙萊浦)’로 불리다가 ‘줄래포(茁萊浦)’로 바뀌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와 『부안지(扶安志)』에 줄래포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줄래포는 줄포로 변경되었다.
용서마을은 줄포면 사무소 서쪽 마을로 서로는 뒷골[후촌(後村)], 남으로는 서빈마을과 이웃한다. 마을 형국이 용(龍)의 꼬리 모양이어서 ‘용골’로 불렀는데, 1940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며 면 소재지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용서동(龍西洞)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후기 세곡을 거두어 보관하는 창고인 ‘남창(南倉)’이 지금의 줄포파출소 서편에 있어 ’창안‘이라고도 하였다.
신기마을은 남으로는 교하, 북으로는 장동리 각동마을과 이웃한 줄포 시내권 마을이다. 새로 조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기로 개칭되었다. 핵교밑[교하동(校下洞)]은 문자 그대로 학교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1943년 줄포항의 번창과 더불어 밀집된 소재지 권역을 10개 마을로 분할할 때 학교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하(校下)라고 이름하였다. 지금도 교하마을을 ‘핵교밑’이라 부르는 주민들이 있다.
남빈(南濱)마을의 줄포 시가지 사거리에서 삼양사 줄포 농장 매갈이간[정미소]에 이르는 지점과, 사거리에서 지서를 지나 부안 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의 ‘ㄴ’ 자 형을 이룬 서남쪽은 예전에 바다였다. 지금의 남부안농협 줄포지점에서 삼양사 줄포 농장 매갈이간까지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았기 때문에 ‘언둑거리’라고도 불렀다. 1927년 언둑거리 서쪽 바다[서빈들] 매립 공사가 완료되면서 언둑거리로 불리던 마을을 서빈(西濱)으로 이름하였다. 뒷골마을은 줄포항 서쪽에 자리한다. 줄포항 뒤에 있는 마을이라 ‘뒷골’이라 불렀다. 십리동[십리(十里)마을]은 줄포 시내에서 동남으로 십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는 줄포-고창 국도[국도 제23호선]를 따라 2㎞ 지점에 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건선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건선면의 은행정과 강동리, 강서리, 사거리, 신기리, 장동리, 동령리, 옹령리, 원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건선면 줄포리로 개설하였다. 1931년 7월 건선면을 줄포면으로 개칭하였다.
[자연환경]
해변가 나지막한 야산인 천대산(天臺山)[42.8m] 남서 기슭 포구에 자리 잡은 줄포리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소규모 도시라 할 수 있다.
[현황]
줄포리의 동쪽과 남쪽은 줄포면의 장동리와 우포리, 황해, 서쪽과 북쪽은 보안면의 유천리, 영전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3.70㎢이며, 용서리·후촌1구·후촌2구·본동리·서빈1구·서빈2구·남빈리·금동리·교하리·신기리·장성리·십리동리의 12개 행정리에 744가구, 1,321명[남 648명/여 67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줄포면 소재지로 부안로와 줄포중앙로가 교차한다. 줄포면 사무소를 중심으로 부안경찰서 줄포파출소, 남부안농협 줄포지점, 남부안새마을금고 줄포지점, 줄포중학교, 부안소방서 줄포119지역대, 줄포 시외버스 터미널, 줄포우체국, 줄포초등학교 등이 자리한다.
용서마을은 일제 강점기 줄포항이 한창 번성할 때 중심 상권의 외곽 지역으로 경찰서, 양조장[주인 아오끼], 마차 조합의 마방간 등이 있었고, 1950년대 중반 서빈동으로 시장이 옮겨지기 전 구시장과 쇠전[우시장]이 있었다.
본동마을은 줄포면의 중심 마을로 줄포면 사무소를 비롯하여 여러 공공시설이 한데 모여 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언덕으로 포구에는 배들이 정박하고 몇 채의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한일합병 후 용서마을 끝 지점에서 남빈마을의 언둑거리까지 제방을 쌓아 택지가 조성되자 면사무소가 들어섰고, 일본인과 중국인 상점들이 잇따라 문을 열면서 본동마을 동편에 이웃한 금동마을과 함께 소재지 중심 마을로 변모하였다. 이 무렵 금동마을의 노상과 골목에는 여인들이 늘어앉아 떡, 고구마, 국수 등을 파는 떡전 거리가 형성되고, 해 질 무렵이면 떡전 거리는 나무전 거리로 변하였는데 주로 유천리와 남포 일대 주민들이 변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았다고 한다.
교하동은 줄포의 주산인 천대산 남쪽, 줄포초등학교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줄포면 사무소 동쪽 줄포 시외버스 터미널 건너 줄포우체국 뒤쪽 마을이다. 북으로는 신기마을, 남으로는 금동마을, 동으로는 장성마을과 접한다. 교육 기관으로 줄포초등학교가 있는데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의 양부인 김기중과 그의 아우 김경중이 부안에서는 최초로 1909년 3월 1일 설립한 사립 영신학교가 전신이다. 당시 김경중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11년 줄포보통학교로 개명하였고, 1915년 줄포공립보통학교[4년제]로 인가되었다. 1923년 6년제로 승격되었고,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이 공포되며 동줄포공립심상소학교로 개명하였다. 1951년 줄포국민학교, 1996년 줄포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부안 김상만 고택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김상만(金相萬)[1910~1994]의 아버지 김성수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큰아들 김상만이 태어난 곳이다. 김성수의 아버지 원파(圓坡) 김기중(金棋中)[1859~1933]이 1895년(고종 32)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를 지었고, 1903년(고종 40) 안사랑채와 곳간채를 지었다. 1984년 문간채를 지어 전체적으로 ‘ㅁ’ 자 형을 이룬다. 부안 김상만 고택은 부안·고창 지방 가옥의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어 주목할 만한 데다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평가되어 1984년 1월 14일 중요 민속 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서빈마을에 택지가 조성되자 어업 조합과 운송 회사[대한통운 전신], 노동조합 등의 각 기관과 술집, 어물전, 젓갈 가게 등의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성시를 이루고, 선착장을 비롯하여 이 일대는 조기 말리는 걸대가 숲을 이루어 하늘을 가렸다. 이렇게 가공된 젓갈과 굴비는 ‘부안 굴비’, ‘줄포 젓갈’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팔려 나갔다.
장성마을은 줄포면 사무소에서 동남방으로 400~500m 지점에 자리한 시가지권 마을이다. 뒤쪽[서북]으로 줄포초등학교, 서남으로는 금동마을, 북으로는 원장동마을과 접한다. 부안-줄포-고창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23호선이 남쪽으로 나 있어 정읍, 고창 및 남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어 ‘장승백이’라 불렀던 마을로, 수백 년 수령의 당산 나무 두 그루가 장승과 함께 마을 지킴이 신으로 받들어졌으며,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마을 장승백이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드는 포구로 수많은 배가 정박했다고 하며, 이때 배를 매었던 배맷돌[말뚝]이 광복 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마을 북쪽 천대산 자락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뒷골 너머가 분탕꼴, 그 너머 마을이 보안면 호암마을이다. 예전에 개를 막기 전에는 이곳에서 소금을 구웠다. 십리마을은 예전에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어디에서도 바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평야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