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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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茁浦面 |
영어공식명칭 | Julpo-myeo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범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에 속하는 법정면.
[개설]
부안군의 남단에 있으며 부안군에서 두 번째로 큰 읍면이다. 1932년까지는 줄포경찰서 등 주요 기관 상당수가 줄포면에 있었으나 1960년 초 줄포항이 폐항되며 발전이 멈추었다. 줄포면 사무소가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줄포4길 9-7[줄포리 408-1번지]에 있다.
[명칭 유래]
줄포(茁浦)는 이 지역에 줄풀이 무성하여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나 『고려사(高麗史)』에 옛 희안현(喜安縣)[보안현(保安縣)]의 안흥창(安興倉) 옆에 줄내[乼川]가 흘렀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줄내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안흥창은 고려 12창의 하나로 지금의 보안면 사창, 남포(南浦) 근처에 있었기에 줄내는 남포천의 옛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줄포의 ‘줄’은 새끼 줄(乼), 즉 밧줄[條所]의 ‘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줄포는 우동리의 부안 김씨(扶安金氏) 집안에서 전해 오는 종중 고문서에 주을래리(注乙萊里)로 나온다. 해옹(海翁) 김홍원(金弘遠)의 아버지 김경순(金景順)[1528~1595]이 주을래리에 저수지를 쌓아 토지를 개간하고 포구를 점유하여 커다란 부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경순이 주을래 포구 30여 결을 점유하기 위해 부안현(扶安縣)으로부터 받은 입안[조선 시대에 관아에서 어떠한 사실을 인증한 서면] 기록에는 지금의 줄포면 줄포리 일대를 주을래포(注乙萊浦)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부안현에서 1675년(숙종 1) 김홍원의 손자이자 우반동 부안 김씨 입향조 김번(金璠)[1639~1689]에게 발급한 준호구에도 “건선면 주을래리 주호(乾先面注乙萊里住戶) 유학김번(幼學金璠) 연삼십칠기묘(年三十七己卯) 본부안(本扶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번은 당시 건선면 주을래리에 살고 있었다. ‘주을래포’는 조선 후기에 ‘줄래포(茁萊浦)’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후 줄포로 변하였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부안군의 건선면과 입상면 일부, 고부군 서부면 일부, 고창군 북일면 일부를 병합하여 대동리, 장동리, 줄포리, 우포리, 신리, 난산리, 파산리의 7개 법정리로 개편하고 부안군 건선면으로 하였다. 1931년 7월 건선면을 줄포면으로 개칭하였다. 1964년 4월 7개 법정리, 34개 행정리로 개편하였고, 1981년 행정 구역을 재조정하면서 7개 법정리, 38개 행정리, 85반이 되었다.
[자연환경]
동쪽은 정읍시의 영원면과 고부면, 남쪽은 고창군 흥덕면, 서쪽과 북쪽은 황해, 보안면과 접한다. 산이 있기는 하나 해발 40m 이내의 구릉 지대이며 논보다 밭이 많은 준평원 지대이다. 대부분 마사토로 이루어져 앞으로도 개간의 여지가 많은 곳이다. 평야의 대부분은 침식 평야이며, 줄포리와 우포리 일부는 해안 충적 평야로 이루어졌다. 해안 충적 평야란 파랑, 해류, 조류 등이 해안에 물질을 충적시켜 만든 지형으로 간척이 원활한 곳이다. 줄포면의 시가지와 후촌, 우포리 외에도 난산리 평야 대부분이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곳이며, 현재 앞바다 먼 곳까지 간척의 가능성이 많다. 1917년 지도와 1934년 지도를 보면 그 후 매우 넓은 간석지가 간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줄포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장동리에 있는 도지산[42.4m]이다.
[현황]
줄포면의 관할 행정 구역은 7개 법정리, 38개 행정리, 85반이다. 줄포면의 법정리는 대동리, 장동리, 줄포리, 우포리, 신리, 난산리, 파산리이다. 면적은 23.11㎢이며, 이 중 농경지가 13.77㎢, 임야 3.39㎢, 기타 5.95㎢ 등이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1,542가구, 2,635명[남 1,289/여 1,34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줄포면 주민자치센터에서 요가, 노래 교실, 에어로빅, 바둑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헬스장, 인터넷 방, 마을문고도 갖추고 있다.
건선면일 때는 면사무소가 난산리에 있었는데, 면의 이름을 줄포면으로 개칭하면서 줄포리로 옮겼다. 1932년 줄포경찰서도 부안경찰서로 이름을 고쳐 부안 읍내로 옮겨 갔고 조선식산은행 줄포출장소와 농산물 검사소 등도 부안읍으로 옮겨 갔다. 이후 줄포항에 토사가 쌓여 폐항이 되자 새로 곰소항이 문을 열었고, 1958년에는 어업 조합마저 곰소항으로 옮겨 가면서 줄포항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김철배[임실군 학예 연구사]는 『부안 이야기』 제14호에서 “줄포에 청나라 상인인 호상(胡商)이 등장하고 곳곳에서 왜인들의 움직임을 기록하곤 하였는데 줄포만에 왜선(倭船)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하고 쓴 일기가 흥미롭다. 1893년 6월 29일의 일”이라며 『홍재일기(鴻齋日記)』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00년대 초에는 전면에 조기 3대 어장의 하나인 위도 앞 칠산 어장이 있어 사금융을 겸한 대상(大商)들인 객주 대여섯 명이 상시 거주하는 등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본 사람들이 상권을 장악하면서 그 유명하던 객주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줄포항의 전성기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약 20년간 지속되었으며 당시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각종 업소만도 30여 개나 될 정도로 번창하였고, 중국인 포목상과 음식점도 10여 개나 되었다. 명월관, 달성관, 장춘관 같은 유흥업소도 대여섯 군데나 있어 매일 가무음곡(歌舞音曲)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도정 공장도 이 무렵에 들어섰는데 인부들만 수백 명이었다. 당시 면 소재지의 기관 단체로는 건선면 사무소를 비롯하여 줄포경찰서, 우편국, 조선식산은행 줄포출장소, 곡물 검사소, 소방서[의용 소방대], 남선전기 주식회사 줄포출장소, 줄포어업조합, 줄포운수주식회사, 신탄조합, 줄포공립보통학교[현 줄포초등학교] 등 15개나 되었다. 특히 의용 소방대의 전신인 소방서는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 전라북도 안에서는 군산항 다음에 두 번째로 설치되었다. 1919년에는 부안경찰서의 전신인 줄포경찰서가 군내 최초로 설치되었고 은행 역시 인근에 조선식산은행 정읍지점 한 곳이 있었고, 부안군에는 조선식산은행 줄포출장소 한 곳뿐이었다. 부안군은 물론이고 전라북도 내에서 몇 번째 안으로 주요 기관이 속속 들어선 것으로 미루어 당시 줄포항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는 풍부한 어장과 수로·육로의 원활한 교통 등 중요 지점으로 지역 여건에 기인한 것이라 할 것이다.
1940년대 이전까지 줄포항은 서해 연안의 4대 항[제물포항, 군산항, 줄포항, 목포항]에 속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토사가 쌓이면서 선박의 입출항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1958년 어업 조합과 부두 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하면서 폐항과 동시에 서서히 활기를 잃어 갔다. 다행히 지리적 여건과 교통상의 이유로 오일장[1일·6일]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보안면과 진서면을 위시해서 고창군 흥덕면의 일부가 줄포 상설 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줄포항이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인근의 어촌들 역시 쇠락하였지만 우포리는 줄포항의 쇠락을 초래한 갯벌로 인하여 최근에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2006년 12월 15일 해양수산부가 줄포만 갯벌 3.5㎢에 습지 생태 관광을 위한 기반 시설을 갖춘 줄포만 갯벌 생태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줄포만 갯벌[고창·부안 갯벌]은 2010년 2월 1일 람사르 습지로 공식 등록되어 생태 공원에 대한 시설이 더욱 보완되고 있다. 여기에 갈대숲 10리길, 야생화 단지, 바둑 소공원, 은행나무 숲길 등을 꾸며 사람들이 찾아와 갯벌 체험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줄포면은 부안군과 정읍 또는 고창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서해안 고속 도로 줄포 인터체인지를 가까이 두고 있는데, 1990년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줄포 농공 단지를 조성하였다.
유적으로 줄포면 줄포리에 부안 김상만 고택[중요 민속 문화재 제150호]이 있다. 교육 기관으로 줄포초등학교와 줄포중학교, 줄포자동차공업고등학교가 있다.
곰소 젓갈 이 유명해지기 전인 1960년대까지는 ‘부안 굴비’와 함께 ‘줄포 젓갈’이 명성을 날렸다. 줄포 어물전 거리를 따라 40여 개 점포가 젓갈의 제조와 판매에 종사하였다. 당시 줄포 젓갈은 전주, 정읍, 익산 등지와 인근 시장으로 팔려 나갔고, 멀리 서울 동대문시장으로도 판매되었다. 김장철이면 인근 지방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부녀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당시 밑반찬용으로 새우젓, 갈치속젓, 밴댕이젓, 황석어젓, 갈치젓, 조개젓, 멸치젓, 꼴뚜기젓, 오징어젓, 잡젓 등이 판매되었고, 김치에 넣는 갈치속액젓,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등도 유명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곰소 젓갈 단지가 전국적인 젓갈 시장으로 성장한 반면 줄포면에는 젓갈집 두어 군데만이 명맥을 이어 갈 뿐이다.
삼양사 줄포 농장 매갈이간[매갈잇간]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아우 김연수(金秊洙)가 세운 정미소이다. 김연수는 1924년 10월 1일 삼양사의 전신인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고, 개량된 농업 기술과 합리적인 관리 체제, 그리고 농업 인재 양성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을 추구하였다. 당시 소유 농지를 측량하여 인접한 땅을 한 덩어리씩 묶어 농장화하였는데, 이때 장성 농장과 줄포 농장, 명고 농장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 농장은 자가 정미 시설을 갖추고 당시 일본 사람들의 독점하던 정미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삼양사는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 자본으로 일컬어진다. 삼양사 줄포 농장 매갈이간은 폐사되었으나 농산물 저장 창고는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