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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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項里 |
영어공식명칭 | Daehang-ri |
이칭/별칭 | 한목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1123년(인종 1) 중국 송나라 사신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쓴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황해의 칠산 바다를 밤에 지나면서 본 풍경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변산 일대 연안의 봉수대에서 사신 일행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리느라 봉화를 이어 받아 올리는 장관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 부안 지역 세 봉수대의 봉화도 그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격포 봉화봉의 월고리(月古里) 봉수대와 대항리 점방산(占方山)의 점방산 봉수대, 그리고 계화도의 계건리(界件里) 봉수대가 그것이다.
[명칭 유래]
부안읍과 격포진으로 가는 큰 길목이 되었다 하여 ‘한목’ 또는 ‘대항(大項)’이라고 이름하였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우산내면(右山內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합구미, 묵정동, 서두리, 자미동을 병합하고 산내면 대항리로 개설하였다. 1987년 산내면을 변산면으로 개칭하였다.
[자연환경]
새만금 간척 사업 은 변산면의 대항리를 시작으로 제1호 방조제, 남가력도, 가력 배수 갑문, 북가력도, 제2호 방조제, 신시 배수 갑문, 신시도, 제3호 방조제, 야미도, 제4호 방조제와 군산시 비응도 등을 연결하는 33㎞ 길이의 방조제 공사였다. 1991년 시작하여 2006년 4월 끝물막이 공사가 완결되었고 2011년 완공되었다. 그 결과 전라북도 해안은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새만금 갯벌이 매립지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하여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민들의 생계 곤란과 환경 파괴 및 생태계 보존에 대한 갈등은 지금도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산면의 대항리는 격포리[적벽강과 채석강, 봉화봉 해안]와 도청리, 진서면의 운호리 등지와 함께 암석 해안이 발달한 곳이다. 암석 해안의 특징적인 지형은 해식애와 파식대이다.
[현황]
대항리의 동쪽은 하서면 백련리와 변산면 중계리, 남쪽은 변산면 지서리, 서쪽과 북쪽은 황해와 접한다. 면적은 6.92㎢이며, 이 중 밭이 0.84㎢, 논 0.18㎢, 임야 3.99㎢ 등이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자미리·대항리·하구리·묵정리·송포리의 5개 행정리에 210가구, 342명[남 175명/여 16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부안댐로에서 분기된 묵정길과 묵정안길을 따라 묵정마을이 있다. 변산로에서 분기되는 새만금로 변에 설치된 새만금 홍보관은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로 바뀌었다. 변산 해수욕장에 도달하기 전에 변산로에서 분기한 합구길을 따라 합구마을이, 대항길을 따라 대항마을이 각각 자리한다. 변산 해수욕장과 이어진 변산로에서 변산해수욕장길과 송포길로 각각 분기되어 남북으로 연결되며, 변산반도 국립 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다. 변산 해수욕장에서 조금 떨어진 변산우회길에서 분기된 자미동길을 따라가면 산속에 자미동마을이 있다. 방포[마근개]는 인근 지역과 마찬가지로 갯벌을 막아서 만든 곳이다.
대항리에서는 나일론 어망이 없었던 1960년대까지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살을 매고 어업에 이용했다고 한다. 그때는 ‘살맥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정치망’이라고도 하고 ‘어살’이라고도 한다. 대항리에서는 지금도 어살이 행해진다. 어살 어업을 하는 주민 김○○[남 69]에 따르면, 어살의 길이는 900m가 넘는데, 독살 어업에서 죽살 어업으로, 그리고 무명실을 이용한 어살 어업으로 발전하다가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나일론 그물을 사용하는 어살 어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변산 해수욕장은 1930년대에 개장한 유서 깊은 해수욕장으로 모래가 부드럽고 수심의 차가 완만해 가족 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변산 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합구미마을 동쪽 산 밑 밭에 대항리 패총[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이 있다. 대항리 패총을 비롯하여 부안 곳곳에서 발견된 패총으로 미루어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육 기관으로 묵정길이 끝나는 지점에 묵정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