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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34
한자 格浦里
영어공식명칭 Keokpo-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진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7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5.52㎢
가구수 678가구
인구[남/여] 1,337명[남 690명/여 647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격포리(格浦里)는 조선 시대에 전라우수영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이 있었던 곳이어서 유래한 지명이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우산내면(右山內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우산내면의 궁항리, 반월이, 종암리 일부를 병합하고 산내면 격포리로 개설하였다. 1987년 산내면을 변산면으로 개칭하였다.

[자연환경]

격포리채석강적벽강 지역은 약 1억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바다에 쌓인 화산재 퇴적층을 살펴볼 수 있는 지질 공원에 해당한다. ‘퇴적층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격포리 퇴적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최근에 쌓인 것이다. 따라서 궁항에서 시작해 봉화봉 해안, 채석강[닭이봉 해안], 적벽강 순으로 해안으로 따라가면 처음 호수가 생겼을 때부터 용암에 묻혀 호수가 사라질 때까지 수천만 년에 걸친 시간 여행을 하는 셈이 된다. 썰물 때 격포항채석강을 찾으면 해변 바닥에 널따랗게 깔린 퇴적층의 평면과 닭이봉 절벽의 단면을 함께 볼 수 있다. 격포리 해안의 채석강적벽강은 퇴적암 지층으로 과거에 이 일대가 바다나 호수였음을 뜻한다. 약 7,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의 대규모 지각 변동으로 저지대를 이루는 분지가 여러 곳에 생겨났고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오랜 세월 동안 때로는 자갈과 모래가, 때로는 셰일과 진흙이 강물을 타고 내려와 여러 겹의 퇴적층이 형성되었다. 이후 신생대에 들어와 이 퇴적층은 지반의 융기로 지표에 드러나게 되었고 제4기가 시작된 약 200만 년 전부터 해수면이 수차례 변동되며 깎이고 잘려 나가 지금의 퇴적층과 단면을 드러냈다. 이 퇴적층을 볼 수 있는 곳은 사투봉[169m] 아래 궁항에서 적벽강이 있는 죽막동까지 약 6㎞ 길이의 해안이다. 또 부안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23호]은 육지의 북방 한계선에 위치한 대규모 자생 군락지라는 의미에서 생태적으로 중요한데,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서 잘 보존되어 있다. 격포리에서 내려오는 건천 가장자리에 후박나무 132그루가 200m가량 빼곡하게 서 있으며, 군락의 끝부분은 해안 절벽과 닿아 절경을 이룬다.

[현황]

격포리의 북동쪽과 동쪽은 변산면마포리도청리, 남쪽과 서쪽, 서북쪽은 황해와 접한다. 면적은 5.52㎢이며, 이 중 밭이 0.89㎢, 논 0.94㎢, 임야 2.49㎢ 등이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궁항리·격상리·격하1리·격하2리·격하3리·양우리·죽막리·반월리의 8개 행정리에 678가구, 1,337명[남 690명/여 64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격포항을 중심으로 부안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격하길과 격하안길, 격포항길, 격포중앙길, 격상길, 격상안길, 격상아랫길 등이 해안의 상가와 마을들을 연결하고 있다. 또한 격포어촌계 회센터와 격포항 여객 터미널을 비롯해 격포항의 북쪽은 부안마실길 구간으로 개발되었다. 변산해변로에서 분기된 죽망동길을 따라가면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해신[개양 할미]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수성당(水城堂)[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8호]이 있다. 변산로 동쪽에는 부안 영상 테마파크와 조각 공원, 격포리의 남쪽에는 궁항로에서 분기된 궁항영상길을 따라 전라좌수영 세트장이 세워져 있다. 변산반월로와 반월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반월마을이 있다. 이외에도 격포리에는 해안가의 전망이 좋은 지점들마다 숙박 및 음식점들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격포 역시 인근 지역과 함께 오래전부터 간척 사업이 계속되어 종암뜰과 격포뜰이 생겨났지만 물을 댈 만한 저수지가 없었기에 일제 강점기 소격마을에 종암 방죽을 만들었다고 한다. 소격마을은 마을 뒷산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데, 소격은 본래 소격포에서 줄어든 이름이며 배가 드나들었던 포구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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