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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15
한자 昌北里
영어공식명칭 Changbuk-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효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창북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창북리에서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15.44㎢
가구수 891가구
인구[남/여] 1,676명[남 846명/여 830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조선 시대 창북리(昌北里) 남쪽에는 나라에 진상할 염소(鹽所)와 염소에서 생산한 소금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부근 산 이름이 소금 창고가 있는 산이라 하여 염창산(鹽創山)으로 불렸고 창북리염창산 북쪽, 즉 창고 북쪽 마을이란 뜻의 ‘창북(創北)’, 창고 머리 마을이란 뜻의 ‘창두(創頭)’라고 하였다. 당시 염소(鹽所)마을[대벌리(大筏里)]을 중심으로 생산된 소금이 염창(鹽倉)에 저장되었다가 창북리에서 조운선에 의하여 서울 등으로 운송되었다. 일제 강점기 ‘창(倉)’ 한자가 ‘창(昌)’으로 바뀌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일도면(一道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일도면의 화상리, 금산리, 화동리, 장제리, 용화동리, 양산리와 염소면(鹽所面) 대벌리 각 일부를 병합하고 동진면 창북리로 개설하였다. 이때 창(倉)이 창(昌) 자로 바뀌어 원래 지명에 담긴 뜻과 마을의 역사적 변천 등이 모두 소멸하였다.

창북리는 서편 끝자락의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다. 이 한적한 어촌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 1912년부터 10여 년간 간재(艮齋) 전우(田愚)계화도에 은거하면서부터이다.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전우를 찾아 계화도를 드나들면서 창북리는 그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당시 창북리 바닷가 뙤장뜸의 주막집은 바닷물이 퇴조(退潮)하는 동안 선비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 매우 붐볐다고 한다.

1922년 전우가 죽자 창북리는 다시 한적해졌다가 1963년 계화도 간척 공사가 시작되면서 다시 붐볐다. 이후 공사가 완공되어 갯벌이 농토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1978년 계화도 간척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섬진강 수몰민을 집단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창북리에 도시 계획형 주택 단지를 조성하면서 마을의 세가 커졌다. 계화도 간척 사업이 완료된 후인 1983년 계화 출장소에서 승격된 계화면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대부분 지역이 계화도 간척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간척지로서 농경지로 활용한다. 남동쪽 끝에 자리한 염창산[53.2m]이 주변에 비해 약간 높은 구릉 지역이다.

[현황]

창북리의 동쪽은 동진면증산리·본덕리, 남쪽은 동진면 당상리, 서쪽은 계화면계화리·의복리, 북쪽은 계화면 양산리와 접한다. 면적은 15.44㎢이며, 이 중 밭이 0.36㎢, 논 12.22㎢, 임야 0.18㎢ 등으로 대부분 농경지로 활용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원창리·창북리·금산리·화상리·화동리·용화리·신창리·창중리·창남리·대흥리·창북1리·창북2리·창북3리·창북4리·창북5리의 15개 행정리에 891가구, 1,676명[남 846명/여 8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새포로[예전 꽤나 번창했던 새포항에서 유래한 도로 이름]와 간재로[유학자 전우를 기리기 위하여 만든 도로 이름]가 외각 지역에서 교차한다. 창북길, 용정길, 금산길, 화상길, 원창길, 신창길, 대흥길, 수문산길 등이 자연 마을들을 연결한다.

공공시설로 계화면 사무소와 농촌진흥청 호남농업시험장 계화도출장소, 계화농협, 계화우체국, 계화보건소, 계화파출소, 창북 마을 회관, 창북 경로당 등이 있다. 교육 기관으로 계화중학교창북초등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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