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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647
한자 高靈金氏
영어의미역 Goryeong G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상월면 월오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논산시 상월면 월오리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
입향시기/연도 1400년대 후반
성씨시조 김남득(金南得)
입향시조 김사행(金士行, 1407~1470)

[정의]

김남득을 시조로 하고 김사행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연원]

김남득(金南得)경순왕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장손으로 고려 때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의(金宜)의 첫째 아들이다. 김남득의 본명은 김기지(金麒芝)였다. 1340년(충혜왕 1) 진사시에 합격하여 감찰집의를 지내고, 공민왕 때 양광도안렴사를 역임하였으며, 판개성부사문하평리(判開城府事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김남득최유(崔濡)공민왕 폐위음모 사건에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록되고 고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에 따라 김기지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경주김씨에서 분적하여 고양(현 고령)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남득(金南得)의 아들 김무(金畝)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바 있고, 정몽주와 함께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려다가 조선이 건국된 후 숙청되었다.

[입향경위]

김사행(金士行, 1407~1470)은 여산군수로 재직하다 홍산군수로 전임되었으나 이미 늙고 더 이상 벼슬에 뜻이 없어 관직을 버리고 노성 화곡에 정착하였다. 김사행이 어떠한 연유로 노성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김사행의 부인이 참판을 지낸 한양조씨 조정(趙靖)의 무남독녀였으며, 조정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고령김씨가 한양조씨를 외손봉사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고령김씨의 입향은 한양조씨와의 혼인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황]

김수문(金秀文, 1506~1568)의 증손 김정황(金鼎黃)은 윤선거의 사촌 매제이고, 『여지도서(輿地圖書)』 니산현 인물조에 의하면 김수문의 6세손 김식(金栻)이 정려를 받았다. 김사행의 후손들은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상월면 월오리에 대대로 세거하고 있으며,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관련유적]

입향조 김사행 묘소는 공주시 탄천면 광명리에 있으며 그의 부인인 한양조씨의 묘소는 논산시 은진면 가야곡에 있다. 김사행의 다섯째 아들 김자성(金子省, 1435~1490)의 묘소에서는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김임 신도비는 아들 김수문소세양(蘇世讓)에게 비문을 받아 1561년(명종 16)에 건립하였다. 비에는 가계도와 함께 비를 세운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임 신도비에 새겨진 석보(石譜)에 의하면 김임과 그의 아들 김수문 모두 양자였다. 당시 양자(養子制)가 일반화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신도비의 뒷면에 새긴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임 신도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김수문의 묘소는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 신양촌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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