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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532
한자 懷尼是非
영어의미역 Song Siyeol and Yun Jeung's Controvers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논산에서 노론과 소론의 선봉에 섰던 송시열윤증의 사상 대립.

[개설]

남인이었던 백호 윤휴(尹鑴)는 새로운 이념설을 주장하면서 모든 경서의 집주(集註)를 상대적 성리학적 견해로 고치고자 하였다. 윤휴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론은 당시 주자학의 적통을 이은 송시열(宋時烈)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따라 송시열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서 시작된 당쟁은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대표하는 노론과 윤증을 대표하는 소론으로 분리되는 삼각관계의 구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러한 논쟁의 지역적 배경이 된 곳이 논산이다. 송시열이 살던 곳이 회덕(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이성(尼城)이어서 그 첫자를 따라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했다.

[내용]

송시열윤증(尹拯)은 사제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친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하는 등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즉 송시열윤증이 거주한 회덕과 이산(현 논산)은 같은 기호 지방이었고, 은진송씨파평윤씨는 당파도 함께 서인에 속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통혼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윤증송시열 문하의 수많은 제자들 중 유독 뛰어나다고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송시열과 자신과는 가까운 인척(姻戚)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서 죽은 부친에 대한 묘갈명을 써달라고 유배지인 장기에 찾아가서 부탁할 정도였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비치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더불어 사문난적으로 규정한 윤휴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를 강하게 비판했다. 송시열윤선거 간의 이러한 감정 대립은 윤선거의 사후 묘갈명 작성을 계기로 해서 윤증송시열의 감정 대립으로 이어졌다.

1673년(현종 14)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문을 송시열에게 청하면서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과 윤선거가 생전에 송시열에게 충고하기 위하여 써놓은 서간인 「기유의서(己酉擬書)」를 보여 주었다. 서간을 받아본 송시열은 크게 불만을 느껴 야유하는 뜻의 묘갈문을 지어 보냈다. 윤증은 4~5년에 걸쳐 편지를 보내어 묘갈의 개찬을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약간의 자구만 수정하였을 뿐 골자는 끝내 개찬하지 않았다.

[전개]

송시열윤증 두 사람간의 정치사상적 견해차도 매우 컸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이념을 좇아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서인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한 반면, 윤증은 양명학을 인정하는 절충적 태도로 탄력 있게 현실을 인식했다. 1680년(숙종 6) 남인의 처벌문제로 서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자 윤증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상의 결함을 지적한 서간 「신유의서(辛酉擬書)」를 지었다.

동생 윤추(尹推)와 교우인 박세채의 만류로 공개되지 않다가, 송시열의 손자인 송주석(宋疇錫)이 「신유의서」를 절취해 전달함으로써 「신유의서」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에 송시열은 크게 노해 윤증과 사제(師弟)의 의를 끊어 버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 시 집권당인 서인 내부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는데, 윤증은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 측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회니시비는 주자학 도통주의에 입각하여 정국을 운영하려 했던 노론계와 이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현실적으로 정치를 운영하고자 했던 소론계의 대립이 송시열윤증 간의 감정과 얽혀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후로 노론과 소론은 경종(景宗)·영조(英祖)·정조(正祖) 대로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노론이 승리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정치 체제로 굳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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