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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496
한자 現代
영어의미역 The Present Ag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지

[정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역사.

[개설]

현대라 함은 역사학의 시대 구분 가운데 사상(思想)이나 그 밖의 것이 현재와 같다고 생각되는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1945년 8·15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동양사에서는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이후부터 현재까지, 서양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로 구분하고 있다.

[행정구역 개편]

일제강점기인 1912년 4개의 현을 모두 군으로 변경하였고, 논산군이 되었다. 1931년 4월 1일 강경면이 강경읍으로, 1938년 10월 1일 논산면이 논산읍으로 승격하였다.

1962년 5월 31일 두마면에 신도내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63년 1월 1일 전라북도 익산군 황하면의 마전리·고내리·황화정리·안심리·신화리·봉동리와 논산군 구자곡면의 마산리·죽평리·금곡리·동산리·소룡리·양지리를 합하여 연무읍으로 승격하였고, 구자곡면을 폐지하여 삼전리·왕암리·야촌리가야곡면에 편입하였으며, 시묘리은진면에 편입함으로써 3개 읍 12개 면 2개 출장소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하였다.

1990년 2월 19일 3군 본부가 있는 두마면에 계룡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993년 12월 1일 논산군 상월면 월오리 일부를 공주군 계룡면 월곡리로 편입시켜 군간 경계를 조정하였다.

1996년 3월 1일 경기도 파주시 등 5개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로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하였고, 논산시 조례로 2개 읍 12개 면 188개 리(里) 11개 동(논산읍의 리를 동으로 변경)을 설치하고, 행정동과 행정리의 명칭·관할 구역 및 동장·이장 정수에 관한 조례로 취암동(화지동·반월동·취암동·지산동·덕지동·내동·관촉동 관할)과 부창동(대교동·부창동·등화동·강산동 관할) 2개 동 463개 통리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2003년 9월 19일 충청남도 계룡시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로 논산시 두마면이 계룡시로 분리되어 2011년 현재 논산시는 2개 읍 11개 면 2개 동을 관할한다.

[해방공간의 논산]

해방과 더불어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지탱하던 관료-유지 지배 체제가 급격하게 붕괴되는 등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됨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중 대표적인 단체로는 좌익 계열의 논산읍 인민위원회, 논산읍 합동노동조합, 논산농민조합, 논산청년동맹, 논산부녀동맹, 논산응징사동맹, 논산국군준비대와 우익 계열의 대한독립촉성논산협의회, 대한독립촉성논산청년회, 논산의용단, 논산부녀회가 있었다.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해방정국 초기 논산 지역의 주요 정치 활동은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은 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전후하여 ‘인민위원회’의 활동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논산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해방과 동시에 논산에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논산군의 인민위원회는 이미 해방 직후부터 논산 지역의 행정권 장악과 더불어 실질적인 자치를 실시하고 있었던 조직이었다.

당시 충남도인민위원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인물인 권영민, 신표성, 조동곤 등은 논산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이는 당시 논산 지역에서 좌익 활동가들이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논산 지역은 6·25전쟁 시기까지 충청남도 남부 지역 좌익운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미군정이 개입하게 되면서 논산군청이 다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관료와 경찰들의 손에 의해 장악됨과 더불어 이들의 활동은 둔화되기 시작한다.

우익 계열의 대표적인 단체였던 독립촉성논산협의회대한독립촉성논산청년회논산군의 각 면을 순회하면서 전단을 돌리거나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주민에 대한 활발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같은 우익 계열의 논산의용단도 귀환병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촉성회 소속 계통의 단체로서 좌익단체의 활동에 대한 무력시위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역시 같은 계열이었던 논산부녀회도 각 면을 돌면서 여성들에 대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 공보국은 194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남한 전역을 현장 답사하면서 지방의 정치 상황과 군정에 대한 여론 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1947년 12월 5일부터 8일까지 주한미군사령부 공보부 관리가 직접 논산 지역을 현장 답사한 후 타이프 용지 25쪽 분량의 보고서를 남겼다. 그 보고서에는 1947년 12월말 기준 논산 지역의 정치·경제 상황과 논산 주민들의 주요 관심사 등이 잘 기록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당시 논산 지역의 정치 상황을 보면 1947년 12월은 1946년 초반과는 매우 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1947년 8월 15일 위기’ 당시 경찰과 우익 세력들에 의해 좌익 세력들이 거의 제거되면서 논산 지역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청년회,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이른바 극우 세력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었다는 사실과, 그나마 조선민족청년단, 여자국민당 등 온건 우파 세력이 이들 극우 세력들과 일정하게 대립하고는 있었으나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 잔존한 좌익 세력 일부가 지하에서 소규모의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정도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다음으로 당시 논산 지역의 경제 상황를 보면 1947년 12월 조사 대상이었던 44개 마을의 농가 호수는 모두 4,750호였으며, 이중 지주가 37호·자작농이 624호·자작겸소작농이 1,414호·순 소작농이 2,675호로 1930년대에 비해 소작농 호수가 줄어들고 자작농 호수가 늘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농지 개혁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으로 이 지역 지주들의 토지방매가 활발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직업 분포는 자유노동자가 2,236호, 관공리가 94호, 상공업이 19호, 수선소 및 주막이 234호, 무직업이 3호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는 조사대상 지역이 대부분 농촌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전체에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 7개, 부분적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 17개, 전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마을이 20개가 넘으며 학교가 있는 마을이 19개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당시 논산 지역 농민들의 주요 관심사를 보면 주로 공출을 실행할 때의 불공정 쿼터 할당이나 관료들의 비이성적인 태도, 식량을 구하는 방법, 식량문제의 심각성, 공출을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자들에 의해 자행된 농민 구타사건, 통일독립국가의 신속한 성립에 대한 기대, 굶주림과 추위로부터의 인명구제에 대한 간절한 소망, 화학비료의 불충분한 공급, 배급품의 불공정한 배분, 다른 상품에 비해 턱없이 낮은 곡물가격, 농지개혁, 비싼 세금, 부족한 교육시설 등이었음이 확인된다.

그 외 당시 논산 지역 주민들의 미국이나 지방정부 혹은 북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이 한국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사대상자의 35.8%가 “그렇다”로, 37.6%는 “모르겠다”로, 26.6%는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으로 나온다. “당신은 지방정부에 대해 만족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42.4%가 “그렇다”로, 57.7%가 “아니다”로 응답했으며 북한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응답자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6·25전쟁과 논산]

1950년 6월 25일부터 시작된 6·25전쟁은 논산 지역의 경우 대둔산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던 공비토벌작전을 제외하고는 1950년 10월 초순경 대체로 끝이 났으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폭격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두 달 반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이는 논산의 6·25전쟁은 논산 지역민들, 특히 ‘논산의 모스크바’라 불렸던 성동면 지역 등 유명 촌락의 주민들에게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와 응어리를 안겨주었다. 6·25전쟁의 비극은 전선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였다. 특히 논산의 6·25전쟁은 좌우익의 싸움을 넘어 마을과 마을, 이웃과 이웃, 입안 어른과 형제간의 싸움을 포괄하는 것이었기에 더욱더 비극적이었다.

[논산시의 출범과 전망]

광복과 함께 논산시에서 일본의 자본이 물러가면서 강경일대의 상권이 힘겨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육군훈련소의 설치, 새마을 운동, 논산시의 출범 등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951년 11월 1일 육군훈련소는 제2훈련소로 창설, 1980년 12월 1일 새마을운동 논산시지회 창립, 1989년 5월 25일 바르게살기운동 논산시협의회 구성 등 지역발전을 위한 다양한 기관과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96년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하면서 변화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논산시의 군수와 시장이 축이 되어 관할하는 여러 기관과 함께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995년에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지방선거를 통해 논산시의회가 구성되고, 논산시의 적극적인 기업유치 전략으로 많은 산업시설이 입지하게 되었다.

논산시는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는 지역이라는 점, 많은 산업시설이 있다는 점, 지역특산물과 지역특색을 이용한 다양한 축제가 많다는 점 등 지역적 특색을 살린 지역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2009년 현재 논산시는 다양한 산업과 입지조성을 통하여 미래산업의 중심도시 구축,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는 균형 있는 지역 육성, 자생력과 경쟁력을 갖춘 농가소득 창출, 시민과 함께하는 따뜻한 복지사회 구현, 시민들이 아늑한 삶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심 구축, 테마가 있는 문화관광 기반 확충, 행정혁신을 통해 시민에게 믿음을 주는 열린 행정 실천 등을 행정의 주요시책 사업으로 삼아 추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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