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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423
한자 村落
영어의미역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성희제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지역에서 주민들 생활의 기본 단위를 구성하는 취락의 한 유형.

[개설]

촌락은 도시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혈연과 지연에 기반 한 인간생활의 기본 단위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통합을 이룬 지역 집단을 가리킨다. 전통 사회에서 주민들은 혈연 및 지연에 기초하고 생업 활동과 신앙생활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사시대]

어떤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선사시대 유적지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논산시 관내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 금강 상류 및 부여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으므로 논산시에서도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신석기시대 다음의 청동기시대에는 삶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생기고 농경이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주로 강이나 바다와 같은 물가에 거주한 데 비해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낮은 구릉지로 이동하여 정착 생활을 하였다. 논산시 일원은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많은 지천과 이들의 주위에 형성된 낮은 구릉지는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논산시와 접해 있는 부여군 초촌면 일대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 분포해 있는 곳이다.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은 충청남도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내륙의 낮은 구릉지에서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거지가 밀집화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기원전 3세기경에 들어온 철기 문화는 초기 고대 국가의 성립과 농경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한시대를 거쳐 백제시대에 이르면 논산은 백제의 중심부에 잇닿은 지역이었다. 백제의 땅은 3국 중 지리적으로 가장 발전 가능성이 큰 지역이었으므로 논산 지역에는 이미 곳곳에 많은 취락이 형성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시대]

1. 15~17세기

조선 전기까지는 하나의 자연촌이 하나의 리(里)를 형성할 만큼의 규모는 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오늘의 논산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은진현, 연산현, 니산현(노성현)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는 매우 적었다. 즉 은진현 506호 1,717명, 연산현 378호 487명, 니산현 384호 1,591명으로 아직 소촌(小村)의 상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31년(중종 26)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호수와 인구수의 기록이 없다.

2. 18~19세기

촌락의 응집이 거의 오늘날과 같이 고정되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1757년에서 1765년 사이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나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의 기록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하여 전국이 완전히 면리(面里) 체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으며, 면리 별로 호수·남녀 수, 경지 면적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촌락의 수나 규모 등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논산 지역은 오늘의 강경읍·논산시·연무읍 일대에서는 규모가 큰 마을을 이루었고, 연산면·벌곡면 일대에서는 소촌의 형태, 노성면 일대에서는 중간 정도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1) 은진현 지역

『호구총수』에 따르면 은진현 지역(강경읍, 논산시, 연무읍)은 리(里)의 평균 호수 90호, 평균 인구수 340명을 넘어 18세기 후반에 이미 촌락의 발달이 크게 이루어졌다. 특히 오늘의 강경읍인 김포면(金浦面)은 평균 호수 277호, 평균 인구수 890명에 이르러 거의 도회지에 버금가는 촌락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부적면, 양촌면, 성동면, 채운면, 가야곡면 일대도 평균 호수 100호를 넘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2) 연산현 지역

오늘의 연산면벌곡면 지역인 연산현에서는 평균 호수 14호, 평균 인구수 60명 정도의 아주 작은 규모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산지가 많아 촌락이 발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니산현 지역

오늘의 노성면 지역인 니산현은 대촌을 이루고 있는 은진현과 소촌을 이루고 있는 연산현의 중간 정도 규모의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니산현이 자연 조건상 평야가 많은 은진현과 산지가 많은 연산현의 중간적 특성을 지닌 지역임을 고려해 볼 때 쉽게 짐작이 가는 사실이다.

[근현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오늘날 행정구역의 큰 테두리가 이루어졌다. 1917년 오치 다다시치[越智唯七]가 펴낸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 따르면 당시 논산군은 15면 190리로 편제되었고, 1개 리(里) 안에 대략 4~5개의 작은 리가 포함되었다.

즉 몇 개의 작은 리가 모여서 행정단위로서의 1개 리를 이루고 있는 형태로, 작은 리는 논산 지역에서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곳곳에 자리 잡으며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촌락이란 오랜 옛날부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경지가 개척되면서 계속 공간을 메워 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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