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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406
한자 處子恩津宋氏墓表
영어의미역 Tombstone of Eunjin Song Clan's Maid
이칭/별칭 처녀무덤갓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성진정현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668년연표보기
재질 오석
높이 82㎝
너비 46㎝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조선 중기 송준길 손윗누이의 묘표.

[개설]

연산면 고정리 광산김씨 선산에 있는 송처자의 묘표는 10세의 나이에 요절한 처녀의 것이기에 주목이 되는데, 묘표는 후에 송준길이 세운 것이다. 이 묘표의 비신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며, 팔작지붕 모양의 가첨석과 농대석을 갖춘 중요한 자료이다.

[건립경위]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운 묘표이다. 송처자(宋處子)는 송준길의 누이로, 외가였던 연산 김은휘 집에 놀러오게 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을 가던 중 병을 얻어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외가였던 광산김씨 묘역에 묻혔다. 1668년(현종 9) 송준길은 외가에 들렸다가 자신의 누이인 송처자의 묘가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묘를 정비하고 송처자 묘표를 세워 찬(撰)하고 서(書)했다.

[형태]

작은 비신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가첨석]과 농대석을 갖추고 있으며, 비신은 오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이 82㎝, 폭 46㎝, 두께 14㎝, 자경은 앞면 13㎝이고, 음기 3㎝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금석문]

전면에는 ‘처자은진송씨묘표(處子恩津宋氏墓表)’라고 쓰여 있다. 음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슬프도다. 여기는 우리 일찍 돌아간 누이의 산소이다. 우리 송씨는 은진에서 나왔는데, 증직 이조판서 이창과 증직 정부인 광산김씨는 곧 우리 돌아가신 부모님이요. 증직 이조참판 응서와 증직 정부인 광주이씨는 곧 우리 조부모요. 행 첨추 은휘와 숙부인 해주최씨는 즉 우리 외조부모이다.

누이께서 만력 계미에 시골집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자품이 남보다 뛰어나게 다르고, 점점 배워 아는 것이 더하면서 더욱 닦고 닦아서 성품이 깨끗하고 정숙해서 더러운 자리에 잠시도 차마 앉지 못하니, 육친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우리 어머니의 작은아버지인 목사공 공휘와, 그 부인인 단양우씨는 누이를 데려다가 같이 살며 길렀다.

임진왜란에 목사공의 온 집안이 호서의 정산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때 사계선생은 그 고을에 원님으로 있었다. 선생은 우리 어머니의 사촌오빠이다. 누이는 고을 관사에 있을 때 홍역을 만나 일찍 죽으니 나이 겨우 10세였다. 슬프도다, 단명함이여, 부모님이 그때 회덕의 집에 계셔서 서로 죽음을 보지 못했으니 더욱 애석한 일이었다.

연산의 거정산에 묻으니, 바로 우리 외조부모의 산소 밑이다. 그 후 70여 년이 지난 숭정 병오년에 아우인 준길이 가서 그 무덤을 살펴보니, 이미 그 무너져 파손됨이 심한 것을 보고, 더욱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분별할 수 없을 것을 크게 염려하고 두려워하여 이에 흙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이어서 작은 돌을 세워서 기록하니 아마도 뒤 사람들은 밟지 말고 뭉개지 말지니라.

슬프다. 내가 이미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별로 없는 내가 늘그막에 또 형제를 잃어서 독신이 된 남자로 신세가 비통하고 처량하며 인정과 도리가 애통하고 절박하다. 그러나 비록 죽어서도 아는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서로 지하에서 모이지 아니하겠는가. 다만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노라. 슬프고 슬프도다. 숭정 무신 정월 일 아우 정헌대부 원임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제주 세자 시강원찬선 준길은 기록하고 쓰다(鳴呼此我殤姊之墓我宋出恩津 贈吏曹判書諱爾昌 贈貞夫人光州金氏卽我皇考妣 贈吏曹參判諱應瑞 贈貞夫人廣州李氏卽我祖考妣行僉樞諱殷輝淑夫人海州崔氏卽我外祖考妣也姊氏以萬曆癸未生於魚第生而姿稟有絶異於人者稍有知益加修飭性潔精陋汙之席不忍須臾處六親奇愛之我先妣之季父牧使公諱公輝其配丹陽禹氏取以育之壬辰倭變牧使公擧室避地於湖西之定山時沙溪先生在其縣先生卽我妣之從兄也姊氏在縣衙遘斑疹夭得年甫十歲噫短矣父母方在懷德第不及相訣尤可哀也瘞於連山居正山卽我外祖考妣兆下也後七十餘歲崇情丙午弟浚吉往省其墳見其頹圮已甚大懼愈久愈不克辨認乃築土以封之仍立小石以識之庶後之人毋踐毋夷也噫余旣早失怙恃終鮮兄弟臨老又喪獨男身世悲凉情理痛迫雖然死而有知幾何而不相聚於泉下耶惟用是自慰鳴呼悲哉 時崇禎戊申正月日 弟正憲大夫原任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 世子侍講院贊 善浚吉記幷書)

[위치]

연산역의 남쪽에서 국도 1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1.5㎞ 정도 가면 남측으로 도로가 보인다. 이 도로를 따라 다시 1.3㎞ 정도 들어가면 고정리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광산김씨 선산에 송처자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 앞에 묘표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묘표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처녀의 것이라는 점에서 다른 묘표들과 달리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송처자 묘표에 보면 광산김씨은진송씨 집안의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광산김씨은진송씨 간의 긴밀한 사족 활동이 있었음을 추측케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송처자 묘표는 당대 명망 있는 집안의 송준길이라는 사상가가 남긴 것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주목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 송처자 묘표에는 누이를 잃고 슬퍼하는 송준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인간적인 송준길,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족을 그리워했던 송준길의 또 다른 면모, 즉 누이를 사랑하는 남다른 정을 엿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12.07 [정의] 수정 누이동생->손윗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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