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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277
한자 成三問
영어음역 Seong Sammun
이칭/별칭 근보(謹甫),매죽헌(梅竹軒),충문(忠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별
생년 1418년연표보기
몰년 1456년연표보기
본관 창녕
대표관직 예방승지

[정의]

조선 전기 논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개성유후(開城留侯)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성승(成勝)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병자사화(丙子士禍) 때 성삼문의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아들 성맹첨(成孟瞻), 성맹년(成孟年), 성맹종(成孟終) 및 갓난아이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손이 끊겼다. 그리하여 성삼문의 제사는 부인 연안김씨가 신주를 만들어 남편의 제사를 지냈으나 부인이 죽은 뒤에는 서울 사는 외손에게 전하여 외손인 박호(박증의 동생)가 봉행하였는데, 박호의 손이 끊기자 박증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성삼문의 제사를 봉행하였다. 후에 난리 등으로 성삼문의 신주와 외손 내외의 신주를 인왕산에 묻얻으나, 1672년 발견되어 송시열의 주관하에 홍성에 모셨다고 전한다.

[활동사항]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홍주 적동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직집현전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등과 함께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明)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 사신을 따라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허조(許慥), 권자신(權自愼), 이개, 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하여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아버지 성승유응부, 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윤사로(尹師路),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또 김질(金礩)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 갔다. 이때 성삼문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 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성승, 이개, 하위지(河緯地), 박중림, 김문기(金文起), 유응부, 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었다고 전한다.

[저술 및 작품]

성삼문은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묘소]

병자사화 때 서울 새남터에서 처형을 당하자 김시습(金時習)이 시신을 수습하여 한명회(韓明澮)의 압구정(鴨鷗亭)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露梁津)에 묻었다고 한다.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일명 ‘일지총(一肢塚)’이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뒷날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 1691년(숙종 17) 신원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으며 장릉(莊陵,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또 1692년 출생지인 홍주 노은동에 노은서원이 창건되어 사육신으로 배향되었고 1680년 분가하여 살던 연산의 한양촌에 사당이 세워졌으며, 1692년 충곡서원으로 바뀐 뒤 사육신으로서 계백(階伯) 장군, 김익겸(金益兼)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0.15 개설 내용 추가 오 : 그리하여 성삼문의 제사는 외손인 박호(박증의 동생)가 봉행하였는데, 박호의 손이 끊기자 박증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성삼문의 제사를 봉행하였다. 정 : 그리하여 성삼문의 제사는 부인 연안김씨가 신주를 만들어 남편의 제사를 지냈으나 부인이 죽은 뒤에는 서울 사는 외손에게 전하여 외손인 박호(박증의 동생)가 봉행하였는데, 박호의 손이 끊기자 박증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성삼문의 제사를 봉행하였다. 후에 난리 등으로 성삼문의 신주와 외손 내외의 신주를 인왕산에 묻얻으나, 1672년 발견되어 송시열의 주관하에 홍성에 모셨다고 전한다.
2012.04.17 출생지 및 묘소 주소 수정 1) 활동사항 - 오 : 홍주 노은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적동리) - 정 : 홍주 적동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 묘소 - 오 :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번지 - 정 :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번지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11.20
박** 성삼문이미지끝4가지 수정요청: 신주함,위패-논산부적면충곡리산13충곡서원에 봉안된것.유허비-1673년논산부적면충곡리446-2한양말에세웠던 비를 어느 을해1755?년에 서원경내로 옮겨온비.성삼문은행나무-논산부적면충곡리446-2한양말에있는둘레가슴높이3.6 하5.6m,높이,폭25-30m 노거수(2012.5.10향토문화유적제41호)성삼문유허,충곡서원유래3월3일글참조 2012.11.14
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의견 반영해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10.15
박** 1.[가계]6행-'성삼문의 제사는' 다음에 <부인 연안김씨가 박종우 노속에서 신주를 만들어 남편을 봉사하였으나 하세한 뒤에 서울 사는 외손에게 전하여 져서>를 첨가요망, 2.[가계]긑행 다음-<난리 등으로 성선생신주와 외손내외신주를 인왕산에 묻얻으나 1672년 발견되어 송시열의 주관하에 홍성으로 모셨다고 전한다.>를 첨가요망(송자대전 성선생천봉기 참조) 2012.10.10
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내용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며, 내용 또한 다소 모호합니다.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을 정확시 적시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2.08.14
박** 논산 성삼문유허지 한양촌에 1680년성선생사당, 1692년 충곡산13에 6신서원, 1702년 8현서원으로 바뀌고, 어느을해년 유허비를 서원경내로 옮겨오고 계속추배 18위가 됨. 노량진사육신공원 사육신묘는 성삼문사위 박임경과 다른 의인들이 장하고 석표함. 이미지 성삼문위패와 함은 충곡서원에 있는 것이고,묘소사당은 지방으로 제사합니다. 확인 수정요망 2012.08.10
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해 주신 내용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4.17
박** 활동사항 오-홍주 노은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적동리)
정-홍주 적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묘소 오-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번지
정-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구로고개 산58번지
2012.04.13
박** 논산성삼문유허는 충곡리446-2이며 성삼문은행나무도 현존.자료중 위패는 충곡리산13 충곡서원에 모셔진 신위임.충곡서원사액년도는 불명.1680년 유허에 성삼문사우,1692산13에 육신서원,1702 8현서원,이현동,박증등10위 추배함.창녕성선생유허비는 유허에서 서원경내로 옮긴것임(비문에 이비사실추기). 201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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