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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184
한자 階伯
영어음역 Gyebaek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만지리
성별
몰년 660년연표보기
대표관직 달솔

[정의]

백제 말기 논산 지역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운 무신.

[활동사항]

성왕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의자왕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는 당나라와 협력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결국 백제의 위기가 현실화되어, 660년(의자왕 20)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지금의 대전 동쪽 마도령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 왔다.

이에 백제의 장군으로 554년에 관등이 달솔(達率)에 올랐던 계백은 결사대 5,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벌에 나가 50,000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황산벌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천호리(天護里)·연산리·표정리(表井里)·관동리(官洞里)·송정리(松亭里) 등을 포함하는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계백이 결사대 5,000명을 뽑으며 말하기를 “한 나라 인력(人力)으로 당(唐)·신라의 대병(大兵)을 막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쾌(快)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식솔들을 다 죽이고 황산벌에 나와 세 곳에 진영을 마련하였다.

계백은 장차 신라군과 일전을 앞두고 사람들과 맹세하기를 “옛날 월나라의 임금 구천은 5,000명으로 오나라의 700,000명의 군사를 무찔렀다. 오늘 모두 다 분발하고 온 힘을 다해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이렇게 5,000명의 결사대는 신라군을 상대하여 매우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하여 네 차례나 신라군을 물리쳤으나 결국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묘소]

계백 장군 묘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계백이 전사하자 신라의 김유신계백의 시신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 부근의 백제 백성들이 계백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6년 구전되어 오던 무덤을 찾았으나 당시에는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부적면 사람들이 복묘(覆墓)하고 지석을 안치한 후 내광 회벽을 완봉하였고, 1976년 5월 19일 성분(成墳)하였다. 봉분은 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이다.

[상훈과 추모]

논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과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충곡서원 에서는 해마다 봄가을로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곡서원은 1868년에 폐쇄되었다가 1933년 복원되었는데, 충곡서원지는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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