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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156
한자 李長生墓所
영어의미역 Grave of Yi Jangsae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묘소
건립시기/일시 조선 중기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장생의 묘소.

[개설]

이장생은 가평인으로 봉산군수를 지낸 이철근의 아들로 1467년에 태어나 1522년에 죽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를 좋아하여 1490년(성종 21) 갑과에 급제하였고 용양을 거쳐 선전관을 지냈으며, 함경도절도사와 충청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고 평안도절도사를 지냈다.

[위치]

연산역 근처 연산중학교 큰길 남쪽에 가평이씨 종산이 있는데, 이장생 묘소는 종산의 재실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조선시대 묘제의 내외 쌍분묘로서, 망주석과 묘표 자리에 복연엽 묘갈이 묘표를 대신하여 세워져 있다. 조선 전기의 묘제와 비갈의 형식이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 ‘가선대부병조참판가원군이공지묘(嘉善大夫兵曹參判 嘉原君 李公之墓)’라고 되어 있고, ‘정부인전의이씨지묘(貞夫人全義李氏之墓)’라고도 새겨져 있다. 전액은 ‘가원군이공묘갈(嘉原君李公墓碣)’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정 연간 임오년 초겨울에 가원군 이공장생이 돌아가니, 향년 56세이었다. 4년 후 을유년 봄에 그 동생 예산현감 장경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우리집과 가깝게 지내고 또 일찍이 내 형의 묘표 일로 은혜를 입었으니, 명을 지어주시게.’ 하였으나, 내가 근심되는 일이 있어 사양하였으나, 예산현감이 나를 찾아오기를 여러 번 하고, 청하기를 간절히 함으로, 이에 허락하고 글을 짓는다.

삼가 공의 선계를 상고하니, 증조 다림은 동지중추원사이요, 할아버지는 형손이니, 적기의 공훈으로 책록되어 가평군을 봉하고, 아버지는 철근이니 벼슬이 봉산 군수로 마쳤는데, 이 분이 전주최씨를 취하니, 희보의 따님이다. 정해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 학문에 뜻을 두고, 아울러 활을 잘 쏘니, 가평군이 그의 장점을 취하여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홍치 경술년에 갑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후부장을 제수하였다가, 선전관으로 발탁되고, 훈련원판관으로 나갔다가, 위원 군수에 보임되고,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인 광흥창수로 옮기고, 다시 전설로 전직하고, 바로 당상에 올라 함경북도 우후로 나가니 나이 겨우 34세였다. 계해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병인년에 훈련도정에 제수 되었으며, 갑자기 함경남도 절도사가 되었다.

정묘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기사년에 충청수군절도사가 되고, 신미년에 병조에 들어가 참의가 되었으며, 임신년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전보되고, 계속 승진하여 좌승지가 되고, 겨울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이 되고, 품계가 올라 가원군을 습봉하였다. 계유년에 형조참판으로 사은사가 되어 남경에 갔다가 돌아와, 부총관을 겸임하고, 갑술년에 한성우윤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병조참판이 되고, 정축년에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가, 기묘년에 병을 얻어 관직을 그만두고, 이로부터 자택에서 편안히 양생하기를 무릇 4년간을 하였다.

공의 성품은 언행이 바르고 점잖았으며, 의지가 강하고 씩씩했으며, 자상하고 세밀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태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군무에 익숙하게 단련하여 통달하고, 또 서찰을 잘 쓰니, 선비들도 따르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매우 가볍게 여겨 크게 쓰이지는 못하여 원대한 꿈을 펴지 못했으니, 이는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 이씨는 첨사 기경의 따님으로, 어질고 집안을 잘 다스려 일가간에 부도의 모범을 되었으나, 공보다 먼저 돌아갔다. 1남 1녀를 두니, 아들 진은 병졸교위요, 딸은 사인 김귀손에게 출가하였다. 진이 충의위 류 우의 따님을 취하여 2남을 두니, 사건과 사립으로 모두 사람됨이 준수하다. 공을 선영을 따라 연산현 천호산 언덕에 장례하니, 부인과는 같은 자리이나, 묘는 따로 썼다.

명하여 가로되, 가평이씨가 대대로 벼슬이 이어지니, 조상은 공훈으로 드러나고, 자손은 재능으로 이름났네. 공은 초년에 학문으로 출세를 구했으나, 붓을 던져고 병기를 잡아 벼슬길에 오르도다. 작은 고을 맡았지만, 어찌 부족하다 하겠는가. 조정에 공훈이 알려져 드디어 병권을 잡았도다. 내린 영이 엄숙하고, 그 풍채가 믿음직하여, 오랑캐도 회심하고 병졸들도 사모하니, 왕이 말하기를 ‘너의 공이라.’ 하였다. 금위 밀직으로 발탁되어 번잡한 임무를 맡았어도, 기능과 법도가 크고 넉넉하여, 동료들도 다시 보게 되었다.

평안도 절도사를 말년에 하였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두 번 속고 업신여김을 당하니 어찌 장구함을 꾀하겠는가. 빨리 중도에서 그만두었으니, 남은 경사가 반드시 모여서 하늘의 보응이 있으리라. 천호산 기슭 쉴 만한 곳에 명사가 복지를 잡으니, 조고가 여기에 계신데, 백세만에 돌아 왔도다. 몇 척 되는 비석에 공덕을 새기니 어그러짐이 없고, 명의 글이 아첨의 말이 아님을 자손들에게 끼쳐 남겨주노라.

통정대부 전홍문관부제학 정사룡 삼가 지음. 황명 가정4년(1525) 을유 8월 15일.”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의 묘제와 비갈 양식을 가지고 있어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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